[자금시장 경색의 원인과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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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최근의 자금시장 혼란은 금융기관들이 신규 또는 만기가 된 기업어음(CP)과 회사채의 인수나 연장을 기피하면서 비롯됐다.

지난해 대우그룹 해체의 여파로 상당수 투신.종금사들이 부실화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데다, 은행들까지 합병대상이 될 것을 우려해 기업에 자금공급을 꺼리는 바람에 시장에서 돈이 제대로 돌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7월부터 채권시가평가제가 시행되면 신용도가 낮은 채권은 주식과 마찬가지로 위험자산으로 간주돼 시장에서 팔리지 않게 된 것도 자금시장 경색을 부채질하고 있다.

정부는 결국 비난을 무릅쓰고 반강제적으로라도 금융기관 돈을 끌어들여 10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회사채와 CP를 사주고, 은행신탁에 단기상품을 허용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 중견기업 연쇄부도 우려〓은행들은 이달말까지의 추가부실 확정을 앞두고 은행 부실정도를 판정하는 핵심 기준이 되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등의 지표를 의식, 기업들의 단기 자금조달 수단인 CP를 사주지 않고 있다.

7월이후에나 정상적인 대출영업을 하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담보가 없는 단기 CP의 경우 해당 기업에 문제가 생기면 고스란히 은행부실로 연결돼 BIS 비율을 떨어뜨리게 된다는 판단에서 인수를 극히 꺼리고 있다.

은행신탁의 경우도 4월 이후 13조원 넘게 돈이 빠져나가 회사채나 CP를 사줄 수 없는 형편이다.

시중은행 자금부 관계자는 "종금사를 비롯한 2금융권이 무너지면서 은행권이 과거 2금융권이 맡았던 역할까지 해야 하나 CP를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신용도가 떨어지는 기업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고 밝혔다.

이에 따라 삼성.LG.SK.롯데 등 일부 우량기업을 제외하고는 과거 3개월이나 6개월이 주류였던 CP 만기도 3일.5일.15일 등으로 초단기화하고 있다.

현재 시장에 발행돼 있는 CP 규모는 60조원에 달하고 그중 삼성.현대.LG.SK 등 4대그룹의 발행분이 25조원 안팎인 것으로 추산된다.

시장에서는 이 가운데 17조원에 달하는 초단기 CP가 기업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투신사의 경우도 최근 97년 발행된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지만 늘어가는 환매에 대응하기 위해 연장을 해줄 여력이 없고, 종금사들은 최근 한국종금 사태 여파로 예금이 빠져나가 기업에 자금을 대주기 어려운 상황이다.

증권사 채권팀 관계자는 "회사채도 연말까지 32조원이 만기돼 돌아오는데 그중 40% 정도는 신용도 BB 이하로 차환발행이 쉽지 않을 것" 이라며 "시장에서는 S.H.D 등 6~7개 중견기업의 자금악화설이 떠돌고 있다" 고 말했다.

올해 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은 대부분 1997년 하반기 이후에 발행한 것으로 만기가 7월(5조1천억원)과 12월(10조4천억원)에 몰려 있다.

◇ 새상품 효과 있을까〓시장 관계자들은 정부가 16일 발표한 단기신탁상품과 10조원 채권투자 전용펀드 조성 등의 대책에 일단 긍정적인 반응이면서도 실효가 있을지는 좀더 두고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10조원 채권투자펀드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강제적으로라도 금융기관들이 돈을 넣게 하고▶신용도별 채권편입비율을 정해 운용자나 채권에 돈을 넣은 기관들의 부실에 대한 책임을 없애며▶채권의 신용도별로 금리차를 크게 두어 편입채권 일부가 부도나더라도 수익을 낼 수 있게 하면 완충장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빛은행 김용희 신탁운용팀장은 "만기 3개월짜리 상품을 허용해준 것은 매우 긍정적" 이라고 전제, "그러나 최근 예금자는 물론이고 운용하는 은행 입장에서도 CP에 자신이 없는 상태라 효과는 미지수" 라고 밝혔다.

대한투신 자산운용실의 김정곤 차장은 "은행 등이 투신운용사 등에 자금을 넣어줄 경우 신뢰회복에 도움이 되고 회사채 시장 활성화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것으로 기대한다" 며 "그러나 별다른 메리트나 강제성 없이 기관들이 돈을 넣을지는 미지수" 라고 밝혔다.

최공필(崔公弼)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재경부의 시장안정대책에 대해 "최근의 시장불안은 정부가 신뢰성을 잃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 이라고 지적하며 "이제라도 금융당국은 워크아웃 기업에 묶인 대출금 등 부실여신의 손실분담 원칙을 제대로 정하고, 기업 및 금융권 구조조정을 확고하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고 말했다.

송상훈.김광기.임봉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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