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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앞둔 달라이 라마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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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대륙의 넓고 기름진 평원을 다 놔두고 하늘로 깎아지르듯 올라간 산.별과 달이 가장 낮게 떠 인간의 마음 속을 환히 비추며 이어주는 히말라야 한 봉우리에 ‘환생 부처’가 산다.

제정일치의 나라 티베트의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 개인의 자유와 민중의 고른 삶을 위해 싸웠던 지난 세기,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의 주인 티베트인들은 서구인들이 부러워하던 유토피아 ‘샹그리라’를 잃고 다른 나라 인도 히말라야의 끝자락에서 살고 있다.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행위와 번외에 짓눌린/사악한 존재를 만나면/귀한 보물이나 얻은 양/그들을 아끼렷다.//다른 이들이 시샘해서/나를 욕보이고 모욕하더라도/나는 패배를 인정하고/다른 이에게 승리를 주련다.//내가 은혜를 베풀고/내가 큰 소망을 가졌던 자가/내게 해를 입힐지라도/그를 성스런 영혼의 친구로 여기련다.”

동족 20만 명이 죽고 6천여 개의 사원이 무너졌으며 끝내 다른 나라에 더부살이하는 신세가 됐지만 그들을 내몬 중국을 원망하지 않는다. 자비의 보살인 관음보살의 화신인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1935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40년 즉위했다.50년 티베트가 중국에 무력 합병되자 59년 히말라야 설산을 넘어와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웠다.달라이 라마는 이곳에서도 티베트 시절과 똑같이 자비로서만 1만여 명의 주민들을 다스리고 있다.

그의 자비정신과 티베트 불교 정신에 바탕한 평화사상,환경운동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은 세계인의 관심을 모았다. 그를 만나 화해와 상생의 정신에 대해 듣는다. 분단과 지역,계층간의 갈등을 넘어 화해의 시대로 가고 있는 우리 민족의 앞길에 대해서도 조언을 구했다.

-불교계는 물론 기독교·천주교·원불교 등 한국의 전 종교계와 시민 단체들이 방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초청을 승낙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초청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41년전 이곳으로 망명한 이래 나는 세계 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불교신자들이 많고 가장 평화를 열망하는 한국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망명할 때 등에 지고 히말라야를 넘어온 경전을 60년대 중반 동국대에 보낸 것도 그런 열망에서였습니다.”

-한국에 가서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요.

“한국 친구가 김치를 보내줘 먹어봤는데,정말 맛있더군요.한국에서 꼭 먹어보고 싶습니다.한국불교와 전통을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의 불교와 전통도 전해주고요. 특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불교 및 다른 계열의 학자, 그리고 일반대중입니다. 정치지도자들도 그들이 원하면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만나도 좋습니다. 나는 어느 나라든 비정치적·종교적인 차원에서 방문하고 있습니다.정확히 말해 인간의 가치 증진과 종교간의 화합을 위해 우리와 다른 종교와 문화의 나라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40여 년 간 망명생활을 하고 있어 민족의 고통이 많으리라 봅니다. 한국 또한 민족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분단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티베트는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끼리 잘 화합하고 있으니 더 광범한 자치권을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만 있으면 그렇게 될 것으로 믿으며 인내와 자비로 중국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의 남과 북은 그 인내의 마음이 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단 50년이면 충분히 인내심을 길렀으리라 믿습니다. 인내심에 기초한 올바른 결단력을 지니고 전체적인 조화를 찾아나간다면 좋은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분쟁의 가장 좋은 해결책은 대화임을 남과 북의 두 정상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경험이 많은 두 분께서 순조롭게 잘 풀어나가리라 믿습니다. 내 것을 지키려고, 따로따로 머물지 말고 한 걸음씩 양보할 때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티베트 불교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새로운 시대에서 티베트 불교가 인류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제 자신이 ‘살아있는 부처’로 불리는 것이 민망스럽습니다.우리는 다 같은 사람입니다.기본적으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마음의 과학입니다. 마음 공부를 잘 해 자비가 삼라만상에 두루 미치도록 하는 게 티베트 불교의 특징입니다. 자비와 융합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세, 이런 티베트 불교의 특성이 심리학·물리학·우주과학·생명과학 등 첨단 학문에도 응용된다면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미래로 나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다양한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위한 것이지 그것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데 여기서 벗어나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어떻게 하면 무지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껄껄 웃으며)바로 그래서 우리가 수행하는 것 아닙니까.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지혜의 수행을 하고,집착을 없애려고 욕심을 경계하는 것이지요.”

-한국 불교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한국에는 여러 종교인들이 많습니다.때문에 한국불교가 종교간 화합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 전통을 이어 받았다는 점에서 티베트 불교와 같습니다.기본적으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마음의 수행, 과학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종교로만 머물려 하지 않을 때 한국불교는 인류의 평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제한을 뛰어 넘는 사이버 시대가 됐습니다.이것은 아득한 시공을 넘어 삼라만상이 교감하는 불교적 세계관과도 상통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시공을 초월해가는 세상을 더욱 인간답게 가꿀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좌중에 웃음이 터졌다.웃음이 걷히자 달라이 라마는

“불교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것이 너무 많다”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 갔다.기자는 불교는 물론 현대물리학·철학·천문학 등 제반 학문에 두루 정통한 달라이 라마에게 간절하게 묻고 싶었다.어떤 시간·공간이 사이버 세상을 ‘극락 정토’로 가꿀수 있는가를.

그러나 대답은 ‘I don’t know.’였다.끊임없이 불교적 시공관을 사이버시대와 접목시키려 했고 첨단과학에도 정통한 사람인지라 그 말은 고승(高僧)의 할처럼 들렸다. 한 순간이면 즉시 석가여래의 땅으로 들어가고 한 생각 돌이키면 몇 억겁을 넘나드는 그 큰 깨달음을 어찌 말로서 설명할수 있겠는가. 그래서 터져 나온 것이 ‘I don’t know.’란 할이다. 자리를 함께했던 조계종 여연스님은 어느 말씀에서보다 크고 명료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망명정부 일을 보랴,세계의 스승으로 이곳 저곳을 방문하랴 무척 바쁠텐데도 활력이 넘쳐보입니다.건강 비법이 있는지요.

“사람들은 다 같지요.충분히 자고 무엇이든 맛있게 잘 먹고 마음을 편히 갖는게 바로 건강의 비결이 아니겠습니까.한국의 인삼이 좋다고들 하는데 나도 한번 맛보고 싶습니다. (웃음)오전 3시30분에 일어나 남을 위해 하루를 적극적으로 마치자는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명상과 생각을 떨쳐버린 무상(無想)의 산책을 하고 오전 5시30분 아침식사를 합니다.

이 후엔 명상과 독서를 합니다.불교서적들을 많이 읽는데 요즘은 마음의 평화를 위한 ‘불교인식론’을 읽고 있습니다.저를 찾아온 분들과 이야기도 나눕니다. 오후6시에 예불을 드리고 이후 이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후 8시30분에 잠자리에 듭니다.”

편하게,깊숙이 잠들기 위해 취침 몇시간 전부터는 아무것도 안 먹는다고 밝힌다.몇년전 어느 글에서 달라이 라마는 잠자리에 들어도 편히 잠들 수 없다고 했다.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면 두고 온 그의 백성, 중국 티베트인들도 저 달을 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는 것이다.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중국에 의해 난민이 됐고 그래서 결단과 내면의 힘을 기른 좋은 기회를 얻게 됐다.중국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며 중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인가.17년전 달라이 라마를 만났던 여연 스님은 당시 수도승으로 보였으나 지금은 대자유인으로서의 풍모를 느꼈다고 실토한다. 자신의 적까지도 사랑하는 삶의 실천인 자비가 달라이 라마를 그들의 문자 뜻대로 ‘지혜의 큰 바다’‘큰 지혜를 가진 세계의 스승’으로 만들고 있었다.

인도 다람살라=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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