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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옆자리에 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5호 10면

나는 서울발 부산행 KTX 131호 열차 15번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본다. 사실은 창밖을 보는 척하면서 옆자리, 서울발 부산행 KTX 131호 열차 16번 좌석에 누가 와 앉을 것인지 잔뜩 신경을 쓴다. 삶은 옆자리에 있다. 우리 삶의 그 숱한 결정적 순간에는 항상 옆자리가 있었다. 학교와 독서실과 사무실과 커피숍과 영화관과 술집과 그리고 버스와 기차와 비행기에서 우리 옆에는 옆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았던 누군가가 있었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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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이렇게 혼자 기차나 고속버스나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갈 때마다 왜 내 옆자리에는 언제나 항상 어김없이 아저씨가 앉는 것인지. 그것도 덩치 큰 아저씨가. 잘 때면 유난히 코를 심하게 고는 아저씨가. 아저씨 코 고는 진동 때문에 원래는 정숙하게 달리는 열차가 마치 청룡열차처럼 요동을 치게 만드는지. 자면서까지 저렇게 에너지를 소모하는데도 어째서 아저씨는 살이 빠지지 않는 것인지.

마침내 아저씨 코를 틀어막아 버리고 싶은 살인적인 충동이 들게 하는지. 이런 나쁜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아, 나는 참 나쁜 사람이구나 하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지. 아저씨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닌데. 의도적으로 아저씨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덩치를 키운 것도 아닌데. 의도적으로 그러니까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로 아저씨가 코를 고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어째서 아저씨는 옆자리에 앉은 나를 절망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죄송하게 만드는지. 그러니까

삶은 옆자리에 있다. 나는 항상 그것이 알고 싶었다. 어째서 발권 시스템에 듀오 같은 결혼정보회사의 매칭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는 건지. 혼자 여행하는 이성을, 비슷한 연령대의 이성을, 가치관과 취향과 관심사가 같은 이성을, 대화를 원하는 이성을, 덩치가 크지 않고 코도 골지 않는 이성을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대체 무엇이 겁나서 내 옆자리에는 단 한 번도 앉히지 않는 건지.

만일 그렇게 하면 정치가, 경제가, 사회 문화가 결딴나고 나라가 망하기라도 하는 건지. 아니면 그런 것이 불륜을 조장하고 미풍양속을 해치고 일부일처제를 흔들고 결국에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인지.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러면 왜 안 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어릴 때 놀렸던, 내가 괴롭혔던, 내가 잘못했던, 내가 모래인지 바위인지 무슨 말을 해서 그것 때문에 가라앉은 올드보이가, 친절한 금자씨가 나에게 복수하느라 발권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으로 취직해서 내 옆자리에는 항상 언제나 어김없이 아저씨를, 코를 고는 덩치 큰 아저씨를 앉히는 것인지. 그러니까

삶은 옆자리에 있다. 남자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군인이, 아저씨가, 스님이 지나간다. 다행히 아직 옆자리는 비어 있다. 아직 내게는 희망이 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 제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런데 아저씨가, 덩치 큰 아저씨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깝게’ 코를 골 것 같은 아저씨가 들어온다. 아저씨가 두리번거리며 좌석을 찾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저씨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 옆자리, 서울발 부산행 KTX 131호 열차 16번 좌석에 앉는다. 그러니까

부디 놀라지 마시라. 만일 서울발 부산행 KTX 달리는 열차에서 갑자기 밖으로 뛰어내렸다는 한 남자에 관한 뉴스를 접하더라도.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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