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총 탈퇴 투표 주도한 서울지하철노조 정연수 위원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내가 하면 민주, 남이 하면 어용’이라는 독선, ‘협상을 통한 10보다 투쟁을 통한 1이 낫다’는 사고는 이제 버릴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지하철노조(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의 노조)의 정연수(53·사진) 위원장이 민주노총 탈퇴를 시도했던 이유다. 서울지하철노조는 15~17일 사흘간 진행된 조합원 총투표에서 찬성 3691표(45.4%), 반대 4432표(54.5%)로 나와 민주노총에 남게 됐다. 그러나 정 위원장은 “탈퇴를 지지한 45%라는 숫자는 변화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노총 탈퇴 건과 함께 실시된 임·단협 잠정 합의 안건은 73.9%(6013표)라는 역대 최고 찬성률로 추인됐다. 임·단협 인준은 노조 집행부에 대한 신임 투표 성격을 띤다. 정 위원장은 17일 서울 용답동 군자차량기지 내 노조위원장실에서 진행된 대면 인터뷰와 18일 전화 인터뷰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내년에 민주노총 탈퇴 여부를 다시 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임기는 2011년 1월 말까지다.

-왜 민주노총을 탈퇴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투쟁을 위한 투쟁, 지도부만 영웅이 되고 조합원이 피해를 떠안는 투쟁은 무의미하다. 이념에 사로잡힌 소모전으로는 노동 현장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1987년 민주노총 설립을 서울지하철노조가 주도하지 않았나.

“지금 민주노총은 너무 멀리 가버렸다. 당장 일자리가 없어질 경영 위기에 처한 사업장에 파업을 강요한다든지, 단위 사업장의 현실에 맞춘 협상을 어용이라고 몰아붙이며 징계하는 행태는 노사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부추기는 선동에 불과하다.”

-공기업 노조라는 특수성을 지적하는 여론이 있다.

“지하철노조가 민주노총의 선봉에서 대정부 투쟁을 하면 할수록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 정부는 여론을 등에 업고 지하철 구조조정과 아웃소싱에 착수할 것이다. 얼마 전 철도노조 파업 때 싸늘했던 국민 여론을 생생히 기억한다.”

-여론이 왜 등을 돌렸다고 보나.

“투쟁 외에 아무런 힘이 없던 때는 거리로 나서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지지도 받았다. 87년 이후 20여 년간 노동계 선배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이제 사회의 한 주체가 됐다. 참여를 통해 의견을 반영하고 제도를 바꿀 힘도 생겼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관성대로 투쟁만 고집해선 국민과 가까워질 수 없다.”

-그러나 조합원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노동운동에 대한 현 정부의 강경 기류가 조합원들에게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을 것이라는 반대파의 선전전도 현장에서 통한 것 같다. 조합원과 집행부가 의견을 공유할 시간도 부족했다.”

-앞으로 어떤 노조활동을 할 계획인가.

“한국 노조에는 기업에 대한 주인 정신, 노조 내부의 도덕성, 사회에 대한 봉사, 이 세 가지가 없었다. 앞으로 이것을 하나씩 갖춰나가겠다. 그동안 노동계는 생산·효율·경쟁을 철저히 외면해왔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 내 집(기업)이 잘 살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노조가 기업의 주인이 되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노사 관계를 어떻게 보나.

“세계경제포럼(WEF) 조사 내용을 보면 교육 부문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1위다. 교육 수준이나 교육열이 세계 최고인 나라가 노사 관계 항목에선 133개 국가 중 131위다. 꼴찌 수준을 면하지 못한다. 우물 안에서 몽니만 부릴 게 아니라 어떤 운동이 생산적이고 조합원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지 함께 고민하겠다. 21세기 노동 현장에서 18세기 방식 노동운동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박태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