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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64조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최근 제2차 금융구조조정과 관련해 추가로 30조원 수준의 공적자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여론에서는 64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공적자금이 이미 투입됐는데도 왜 실제로 은행들의 실질적인 내실화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제1차 은행구조조정의 내용을 보면 1997년 말 기준 국제결제은행(BIS)비율이 8% 미만인 12개 부실은행 중 5개 지방은행은 청산 후 자산.부채인수(P&A)방식에 의해 자산과 부채를 다른 우량은행에 인수시킨 반면 나머지 은행들에는 잠식된 자본을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여기서 흥미로운 결과는 P&A방식에 의해 청산은행의 예금부채.건전자산과 함께 자산을 초과하는 부채만큼의 공적자금을 인수한 은행들은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지 않은 반면 그냥 공적자금을 받아 부실채권을 청소한 은행들은 여전히 경영상태가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P&A방식은 예금자는 보호하되 실패한 은행은 도와주지 않은 반면 후자의 경우는 예금자 보호라는 미명 아래 실패한 은행에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는 은행경영을 부실화시킨 경영진.직원, 그리고 주주 모두에게 그 책임을 물은 셈인 반면 후자의 경우는 일부 경영진.일부 직원, 그리고 주주들이 퇴출되긴 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직원과 조직.은행 자체는 건재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직접 투입한 은행의 주주들에게는 감자를 통해 응분의 자구노력을 부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은행의 경우는 그동안 정부가 실질적으로 금융경영을 좌지우지했었기 때문에 오히려 경영부실의 책임을 져야 할 정부가 제1주주로 등장해 그 경영의 주체가 된 셈이다.

두 가지 구조조정방식의 성과의 근본적 차이는 P&A방식은 철저한 자기책임의 원칙 아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차단할 수 있었던 반면 직접 공적자금 지원의 경우는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최근 2조여원이 투입된 투신사 공적자금 지원도 큰 성과를 기대하기가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예금자와는 달리 정부가 보호해야 할 의무도 필요도 없는 투자자를 보호하는 것도 문제지만, 부실화한 '기관' 을 도와주는 정책은 또다시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부가 증권시장을 회복시키기 위해 공적자금을 꼭 쓰고 싶다면 부실화한 투신사를 지원하는 방식보다 재경부 금융정책국이 직접 증권투자에 나서거나, 아니면 2조원을 바다에 내다버리면서 세상에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도덕적 해이를 초래하는 정책은 쓰지 않는다" 는 선언을 하는 것이 오히려 국가신인도 제고에 더 기여하는 길일 수 있다.

64조원을 활용해 긴박한 위기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음은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지만 이 과정에서 교훈을 바로 얻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 제2차 금융구조조정은 우선 예금지급은 보장하되 투자는 전적으로 투자자의 책임에 맡긴다는 기본원칙 아래 정부의 개입 여부를 결정하고 예금 대지급을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경우에도 부실기관은 반드시 청산한다는 원칙 아래 가능하면 P&A방식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공적자금으로 부실은행의 대차대조표를 깨끗이 청소해준다거나 부실은행과 건전은행을 인수.합병(M&A)시킨다고 해서 반드시 은행의 경쟁력이 살아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금융구조조정에 따른 금융시장에 대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기능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과거 위기극복을 위해 불가피하게 취할 수밖에 없었던 투자자 지원이나 부실 금융기관.기업의 소생을 위한 자금지원 등과 같은 일부 불합리한 정책관행들은 이제 과감히 바로 잡아나가야 할 것이다.

과거에 발목이 잡혀 불합리한 정책을 지속하는 것은 오히려 국민경제에 해가 될 뿐이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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