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뉴 김정일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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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느 나라에서나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동독의 마지막 총리를 지낸 로타르 드 메지에르가 4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동독이 몰락한 근본 원인을 공산당(사회주의 통일당)지도자들이 시대조류에 맞는 개혁을 하는 데 실패한 데서 찾았다. 소련과 다른 동유럽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일의 변화에 관심을 쏟고 있는 우리들에게 동독의 실패한 지도자의 진단은 전혀 반갑게 들리지가 않는다. 우리는 김정일의 신사고(新思考)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김정일이 마침내 바뀌고 있고, 남북 정상회담 수락과 중국 방문의 결단이 그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정상회담뿐 아니라 남북관계와 한반도의 장래를 낙관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는 신사고를 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글라스노스트(공개)로 투명하고 민주적인 정치를 하고, 페레스트로이카(개편)로 소련경제를 시장경제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그는 특권을 누리는 공산당 간부들의 저항을 극복하지 못해 드 메지에르가 말하는 개혁에 실패한 공산주의자로 끝났다.

그러나 동유럽국가들과 소련의 말로(末路)만을 보고 공산주의자들은 개혁을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김정일에게서도 변신을 기대할 수 없다고 속단할 건 없다. 공산주의 역사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개혁에 성공한 공산당도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와 그의 동지들이 창당한 이탈리아 공산당이 그 중의 하나다.

소련 공산당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출발했던 이탈리아 공산당은 1991년 대중적인 좌익민주당으로 과감한 변신을 하고, 94년 총선에서는 중도 좌파연합을 이끌고 승리해 여당이 됐다.

그런 변신은 보수정당과의 화해노선을 채택한 엔리코 베를링게르와, 일찍부터 당내민주주의를 주장한 피에트로 잉그라오 같은 탁월한 지도자의 리더십에 힘입은 바 크다.

시대의 변화가 사람을 바꾼다. 김정일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지난달 말 중국으로 달려간 북한 지도자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김정일이 아니라 '뉴 김정일' 이라고 믿고 싶다. 그는 베이징(北京)에서 장쩌민(江澤民)에게 북한의 고난의 행진이 끝났다고 말했다. 최악의 식량난을 극복한 데서 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는 중국의 경제개혁을 찬양했다. 김정일이 높이 평가한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노선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이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정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강력한 공산당 일당독재를 유지하면서 경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하는 것이다. 호떡집 간판을 걸고 햄버거를 파는 경제다.

김정일은 베이징 교외에 있는 중국의 실리콘 밸리(中關村)의 롄샹(聯想)이라는 대표적인 민간 컴퓨터회사도 방문해 자본주의 경제의 꽃을 감상했다.

일부 관측통들의 말대로 중국의 개혁에 대한 그의 찬사와 실리콘 밸리 방문이 바깥 세계에 보이기 위한 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은 서방언론들이 말하는 숨어 사는(reclusive) 폐쇄적인 지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면 그것 자체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는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83년 이래 중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김정일은 중국의 변모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받은 충격이 개혁.개방의 결단으로 이어지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러나 그는 개혁.개방이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는 개혁.개방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중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당분간은 안으로 소화시키려고 할지도 모른다.

닷새 뒤면 김정일은 우리 앞에 신비의 베일을 벗는다. '뉴 김정일' 의 등장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 일 없기를 바라지만 이런 기대가 무너지면 대북정책의 전체 구조가 흔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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