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사이버 섹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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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수없이 많은 우연적 요소가 합치해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날 수 있다.

필연을 가장한 우연의 집적(集積)이 인연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객관화한 우연의 요체는 희극성이다. 그래서 남녀의 만남은 언제나 코미디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로맨틱 코미디가 영화의 장르로 자리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934년 프랭크 카프라 감독이 만든 '어느날 밤에 생긴 일' 을 로맨틱 코미디의 효시(嚆矢)로 본다면 벌써 70년 가까운 연륜이 쌓였다.

로맨틱 코미디는 오해와 우연이 뒤섞인 갈등구조를 축으로 하지만 해피엔딩이 일반적이다.

미국 배우 멕 라이언에게 잘 맞는 장르다.

98년 노라 에프런이 연출한 미국 영화, '유브 갓 메일' 에서 라이언은 '숍걸' 이란 아이디를 가진 작은 동네서점 주인으로 나온다.

대형 체인서점인 폭스북스의 소유주인 톰 행크스는 'NY152' 라는 아이디로 숍걸과 e-메일을 주고받는다.

자본시장의 승자와 패자가 대립관계를 뛰어넘어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도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로맨틱한 만남을 꿈꾸는 많은 이들을 사이버 공간으로 더욱 몰아넣는 기폭제가 됐다는 얘기도 들린다.

며칠 전 미 사이버 섹스 중독 대책위원회(NCSAC)는 미국의 인터넷 사용자 중 2백만명이 사이버 섹스 중독증을 앓고 있다는 내용의 충격적 보고서를 발표했다.

1주일에 15~25시간씩 외설 사이트를 전전하거나 낯선 상대와 채팅으로 음란대화를 나누는 불건전한 현상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직자.대학교수도 예외가 아니다.

남성들은 주로 음란 사이트에 들어가 포르노그라피를 즐기는 반면 여성들은 채팅이나 전자우편을 통해 감각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사이버 섹스의 등장이 인류에게 축복인가 저주인가에 대한 논란이 어제 오늘 얘기는 아니다.

경계가 없는 만남과 소통의 새로운 천국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육체적 인간관계의 종말을 예고하는 악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가상세계에서의 만남과 소통으로 현실세계의 그것을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망상이라고 프랑스의 도시공학자 폴 비릴리오는 말한다.

뼈와 살을 가진 동물적 육체로서의 인간은 설 땅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레비는 단순한 매개체로 가상공간을 이해하고 있다.

인간의 현실 공유를 도와주는 수단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인터넷 채팅룸을 전전하는 남자들 가운데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별로 없으니 여성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는 NCSAC 보고서의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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