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세상보기] 비무장지대 그대로 보존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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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휴전선 6백여 리를 돌아보고 왔다. 그 곳은 토지가 아니라 성역(聖域)이다.

본디 휴전선은 하나의 선(線)으로 그어졌다. 휴전회담 막바지에는 서로 땅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피로 물들인 격전이 되풀이된 곳이었다.

그런 휴전선 안쪽으로 각각 2㎞씩 비무장지대를 두어 그 남.북방 한계선 안의 면적이 무려 19억2천만평이나 되는 것이다.

'휴전' 혹은 '비무장지대' 라는 이름과 상관없이 50년 가까이 서로 총부리 맞댄 살벌한 작전 감시지구인 것이다.

하지만 앞산에서는 안개비에 젖은 뻐꾹새 소리도 건너오고 풀섶도 늪도 있었다. 숲의 신록에 눈이 시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비무장지대 한계선 안팎은 상대방을 변함없는 적으로서 감시해야 한다.

그래서 일정한 지점의 시야에 방해가 되는 나무들이나 그 밖의 생태를 시계청소(視界淸掃)라는 이름으로 불태워버린 곳이 적지 않다.

그뿐 아니라 분계선 어느 한쪽에서 산불이 날 경우 그 불이 번지거나 넘어오지 못하도록 맞불작전을 할 때도 있다.

군사작전은 그 자체가 절대과제이므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 휴전선 일대를 흔히 말하는 생태적 낙원이라고 보기엔 문제가 있다. 그 곳에 매설된 지뢰만 해도 엄청나다.

이런 휴전선이건만 거기에서도 시대의 진전을 감지했다. 최근의 금강산관광 및 금강산으로 가는 철도 부설의 구상과 함께 활발한 남북교류는 이 같은 휴전선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6월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의의는 휴전선 분단체제를 살아온 지난 세월을 돌이키게 했다.

이와 함께 휴전선 일대의 토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벌써 옛 격전지 부근의 땅값이 껑충 뛰어오르고 서울의 토지투기꾼들이 여기저기 땅을 사들이고 있다.

또한 휴전선 일대의 옛 토지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이 통일 이후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통일 이후 이 일대는 커다란 토지분쟁에 휩쓸릴 것이 틀림없다.

통일은 동족상잔의 전쟁과 분단의 오랜 원한을 풀어버리는 일이고 세계냉전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휴전선의 길고 긴 철조망을 걷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단으로 고착된 그 비무장지대는 자연자원과 역사와 문화의 유산을 지켜내는 자연신락의 오롯한 공간으로 지정돼 마땅하다.

그래서 휴전선은 분단의 현장으로부터 민족의 사회통합을 이룬 광장이고 세계평화 혹은 자연친화의 현장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때마침 한국에서는 내셔널 트러스트운동체가 만들어졌다. 이미 창립대회에서 남한 8개 후보지를 자연신탁의 대상으로 삼았고 앞으로 1백여 곳으로 넓혀갈 것이다.

장차 통일의 날에는 북한의 여러 곳도 신탁에 의한 시민적 보존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국토는 황폐화하고 있다. 국가나 개인의 걷잡을 수 없는 개발은 국토에 대한 어떤 존엄성도 담보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때 내셔널 트러스트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삶의 터전을 자연과 문화의 차원 안에서 확보하는 최선의 인간행위일 것이다.

나는 삶을 보위하는 체제일지라도 국가 역시 인간의 이성에 의한 시간의, 공간의 품성을 유지하기엔 부적당하다고 믿는다.

국가범죄.국가폭력 앞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일은 시민적 정치문화의 역량밖에 없는 듯하다. 시대의 주체는 권력에서 의무로 나아가고 있다.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도 그 중의 하나다.

이제 그 일이 시작되고 있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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