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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즉심법정에선 지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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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갓 스물을 넘은 앳된 모습의 대학생부터 70대 중반의 할머니까지…. 법원의 즉결심판 법정이 각종 생계형 범죄자들로 북적이고 있다. 최근 경제난을 반영하듯 이곳 '서민법정'에는 안타까운 피고인들의 사연이 이어지고 있다. 담당 판사들도 "피고인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도무지 벌을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도로교통법이나 향토예비군법 위반자가 대부분이었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절반 이상이 생계형 범죄자라는 것이 법원의 설명이다. 서울중앙지법의 321호 즉결심판 법정을 통해 서민들의 애환을 들여다 봤다.

◆ 즉결심판이란=2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등에 해당하는 사건에 대해 '즉결심판에 관한 절차법'에 따라 경찰서장의 청구로 이뤄지는 약식 재판이다. 정식 형사소송 절차는 생략된다. 즉심에서는 피고인의 자백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있으며, 즉심 결과에 불복할 경우 일주일 이내에 정식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

*** 전단지 돌리다 걸린 70대 할머니

#장면1:"하루 2만원 버는데 벌금 나오면 약 사먹을 돈도 없어요. 한번만 봐주세요."

서울 종로 일대에서 음식점 홍보용 전단지를 돌리다 즉심에 넘겨진 이모(76)씨 등 60~70대 할머니 7명이 나란히 법정에 섰다.

이들은 "자식들 사업이 망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밥값이라도 벌려는 생각에 불법인 줄 몰랐다"며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다. 담당 판사도 이들의 처지를 감안해 벌금형을 면제해 줬다.

김모(65)할머니는 법정을 나서며 "경찰 단속을 피해 도망가느라 넘어져 무릎이 다 깨졌는데도 약값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한 호프집 광고 용지를 돌리다 적발돼 법정에 나온 박모(22.여)씨는 판사가 "벌금 3만원"을 선고하자 연신 울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구하지 못해 호프집에서 시간당 3000원을 받고 아르바이트하다 법정까지 불려나온 자신의 처지가 너무 처량하다는 것이다.

*** 전직 증권맨, 무임승차하며 택배

#장면2:서울 시내에서 지하철을 이용해 서류 봉투 등을 배달하는 신모(45)씨가 무임승차 혐의로 법정에 불려 나왔다.

최근 배달 주문이 하루 한두건 정도로 줄면서 지하철 요금 내는 것조차 빠듯하다는 신씨의 말에 판사는 벌금형을 면제해 줬다.

증권회사 간부로 일했던 신씨는 정리해고된 뒤 지난해 초 택배 회사에 취직했다.

배송료의 30%만 회사에 내면 되기 때문에 하루에 1만원짜리 10건만 올리면 생계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올 들어 일거리가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공사장 막일까지 해도 최저 생활비조차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택배를 위해 몇푼 안되는 지하철 요금을 아끼려 무임 승차를 계속하다 붙잡혔다.

그는 "몇백원을 못 내 재판까지 받는다고 생각하니 가족은 물론 부모님 볼 면목이 없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 빚으로 넘어간 트럭 허위 도난신고

#장면3:40대 초반의 박모씨는 차량 도난 허위 신고 혐의로 법정에 나왔다. 트럭에 야채를 싣고 다니면서 팔던 박씨는 올 들어 장사가 너무 안 돼 아이들 학비 마련도 어렵게 되자 빚을 얻어 쓰게 됐다.

지난 4월 5000만원짜리 차량을 담보로 사채업자에게서 500만원을 빌렸으나 이자조차 제대로 갚지 못했다. 결국 차가 사채업자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돈을 마련해 보려고 했지만 전혀 방법이 없더라고요. 어떻게든 차는 찾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허위 신고를 했습니다"라고 말한 뒤 고개를 숙였다.

서울중앙지법에서 즉심사건을 전담하는 김경수 판사는 "피고인들의 범죄 사실과 사연 등을 듣다 보면 서민들의 삶이 너무 어려운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해진다"고 말했다.

심경 판사도 "피고인들의 사연을 들어본 뒤 재범이 아닌 경우 대부분 선고유예 등의 방법으로 벌금을 면제해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진배.천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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