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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입법 얼마나 졸속이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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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불량 국회’는 나라 곳간에도 큰 구멍을 낼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 4월 졸속처리한 한국토지주택공사법 때문이다. 정부는 통합 이전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에서 매년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씩의 이익잉여금을 회수해 왔지만 두 기관의 통합을 다룬 이 법에선 그 근거가 사라져버렸다. 법안을 만들면서 이익잉여금 관련 조항에 ‘국고에의 납입’이라는 말을 빠뜨려서 생긴 일이다. 주공과 토공이 지난 5년간 정부와 국민주택기금 등에 납입한 이익잉여금은 1조2609억원에 달한다. 법안 대표발의자였던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실에선 “많은 쟁점을 조정하다 생긴 단순 실수”라고 말했다. 이같은 사실을 발견한 이혜훈 의원이 개정안을 내놓았지만 처리될지는 미지수다. 지난 8일 한나라당이 4대 강 관련 예산을 기습처리한 뒤 해당 상임위인 국토해양위가 파행상태여서다.

기획재정위에는 지난해 12월과 지난 4월 개정한 개별소비세법·관세법 등을 원상복귀시키는 정부 법안이 계류 중이다. 정부는 당시 교육세와 교통·에너지·환경세(교통세), 농어촌특별세(농특세) 등 목적세 폐지를 시도하면서 2010년도부터 특정 품목에 대한 개별소비세를 인상하는 등 세율 조정안을 내놨다. 그러나 여야가 세율 조정안은 합의로 통과시켰으면서도 그 전제 조건인 교육세와 농특세 폐지안은 지금까지 묶어둔 게 문제였다. 결국 재정부는 실효성 논란이 계속돼 왔던 목적세 폐지를 사실상 포기했다. 국회 재정위 관계자는 “비쟁점 법안부터 우선 처리하려다 고비를 넘지 못해 법안이 뒤죽박죽이 됐다”며 “만약 국회 파행 때문에 연내에 개별소비세법 등을 되돌려 놓지 못한다면 세율이 엉망진창이 된다”고 말했다.

정부의 ‘몰아치기 입법’이 낳은 부작용도 있다. 지난 연말 직권 상정으로 처리된 ‘행정기관 소속 위원회 설치법’이 대표적이다. 행정부 내 위원회 설치는 법령에 따라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이전 정부에서 크게 늘어난 각종 위원회의 부작용을 일소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법은 총리실이 최근 임의로 발족시킨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의 위법성 논란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석연 법제처장은 지난 10일 국회 예결위에서 “모든 위원회를 엄격히 법령으로 다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명지대 윤종빈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쟁 때문에 법안 심의를 뒷전으로 미룬 탓에 법안의 혜택이 시급한 국민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며 “상시 개원제도 등으로 심의 제도를 개선하고 의원 평가에 가결된 법안의 질적 내용을 따지는 감시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장혁·권호·선승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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