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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대통령도 청와대 앞 민생탐방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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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청와대 주변에는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동네들이 많다. 바로 코앞에 궁정동과 효자동.창성동이 있고 적선동.청운동.통의동.삼청동.팔판동 등이 반경 500m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한 나라 권부의 핵심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치고는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곳이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권력의 세도도 없고 매우 서민적이다. 재력의 교만도 없고 향토적이다. 권력과 재력이 거들먹거리기에는 이 올망졸망한 동네가 너무 들여다보이고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두려울 것이다.

청와대 입구로 연결되는 효자로와 청운동 길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길목의 상점들은 시골의 낯익은 가게와 다를 바 없다. 떡볶이집과 재봉틀 두개를 들여놓은 옷 수선 집, 싸구려 구둣방과 빵가게, 해장국집들도 늘어서 있다. 가장 많은 음식점의 메뉴는 김치.된장찌개 등 5000원짜리가 주류를 이룬다. 골목길로 들어서면 다 쓰러져가는 가옥도 몇 채 눈에 들어온다. 허수룩한 대문이 활짝 열려 있으나 인기척이 전혀 없는 집도 나타난다. 대통령 옆에 사는 동네치곤 다소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그러나 저녁 무렵 큰 식당에 동네 사람들이 몰리면서 간간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때로는 격한 토론이 들창 너머 골목에까지 들린다. 국가보안법 폐지안에 대한 찬반 의견이 섞여 나오고 취중 목소리가 한 옥타브씩 올라간다. 그런데도 식당 주인은 태평스러운 눈치다.

계속되는 불경기로 살맛이 없어졌다는 푸념들이 이어져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세상 많이 변했어요. 옛날 같았으면 대통령 코앞에서 저런 언론자유를 구가할 수 있나요. 헤헤. 무슨 사단이 일어나고 말지요." 권력에 대한 생체적 반응이 무뎌진 탓일까. 서민들에겐 권력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지 모른다.

주한 중국대사관의 외교 관리들도 이 동네 식당을 이용하는 주요 고객들이다. 임시 대사관이 창성동으로 옮겨진 뒤 그들은 청와대 주변의 여러 식당에서 한국인들의 정서를 몸으로 느낄 것이다. 중국 정부의 고구려 역사 왜곡 이후 국민의 냉랭한 감정이 부담스러운 듯 수많은 경찰이 지금도 밤낮으로 대사관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한국 최고 통치권자와 지근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대사관은 한국인의 마음을 가장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해온 셈이다.

청와대 주변 동네는 압축된 민생 현장이다. 추석을 앞두고 대통령이 청와대 길 건너 옥인시장에 가 보면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또 가게주인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주부나 길가 상인에게서 텁텁하고 걸걸한 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대통령이 한 걸음만 나서면 서민들의 가계를 리얼 타임으로 감지할 수 있다. 때로는 비서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채 국민의 생소리를 듣는 것이야말로 정치가의 의무이며 책임일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거주하는 백악관 주변에 이런 서민동네는 꿈도 못 꾼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총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총리조차 그런 동네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통치자들이다.

1979년 궁정동의 총성 이후 80~90년대 중반까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짓눌려 있었던 청와대 앞 동네가 이제 더욱 밝아졌으면 좋겠다.

이 가을에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앞 동네를 산책하며 서민들의 세상 사는 모습을 직접 봐주길 바란다. 골목길에 들어서 있는 한옥 찻집에서 대통령이 보통사람들과 차를 마시며 세상의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고 듣는 진지한 모습을 보고 싶다. 국민의 눈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읽는 대통령이 기다려진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