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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를 지우고 싶은 영조, 탕평을 제안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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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호 32면

영조의 왕세제 책봉 죽책문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세제에 책봉되고, 노론은 대리청정까지 주장했으나 이는 훗날 영조에게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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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 강경파(峻少)와 남인 일부가 이인좌를 중심으로 군사봉기까지 일으키자 영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론 온건파(緩少)가 나서서 진압한 것이 영조에게는 큰 다행이었다. 그러나 노론은 ‘소론에서 역적이 나왔다’면서 이인좌의 난을 소론 전체를 공격하는 계기로 삼았다. 자칫하면 노론만의 임금이 될 처지에 놓인 영조는 소론과 노론을 모두 비난했다.

“소론의 김일경 무리에게 효경(梟<734D>)의 성질이 있었다면 노론에는 정인중 무리들이 효경의 성질이 있었으니, 피차에 어찌 역적이 없는 당이 있었는가?(『영조실록』·『승정원일기』 4년 9월 24일)”

① 조문명 초상 조문명은 소론 탕평파로서 그의 딸은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부인이 되었으나 효장세자가 요절하면서 왕비가 되지 못했다. ② 영조의 탕평비 성균관대 안에 세워졌다. ‘두루 화친하되 편당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심이고, 편당하며 두루 화친하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사의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는 『예기』의 구절을 새겨놓았다. 사진가 권태균

효(梟)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이고 경(<734D>)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으로서 불효자나 역적을 칭할 때 주로 사용한다. 영조를 압박한 소론의 김일경이나 경종을 시해하려 한 노론의 정인중이나 모두 역적이란 뜻이었다. 경종의 충신이 영조의 역적이 되고, 영조의 충신이 경종의 역적이 되는 모순된 현실이었다. 이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양자를 다 아우르는 탕평책(蕩平策)밖에 없다고 영조는 생각했다. 탕평이란 『서경(書經)』 ‘황극(皇極)조’에 “편이 없고 당이 없이 왕도는 탕탕하며, 당이 없고 편이 없이 왕도는 평평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란 구절에서 나온 말로서 왕도는 공평무사하다는 뜻이다. 서인이 노·소론으로 갈려 싸우던 숙종 20년경 소론의 박세채(朴世采)가 처음 주장했으나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영조가 사실상 노론의 추대로 즉위한 사실을 아는 소론 온건파로서는 자신들도 등용하겠다는 탕평책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김흥경(金興慶)·김재로(金在魯)·유척기(兪拓基) 등 노론 대신들은 이에 반발해 사퇴했다.

그런 과정에서 각 노·소론의 현실적인 정치가들이 탕평파를 구성하는데 노론에서는 홍치중(洪致中) 등이, 소론에서는 조문명(趙文命)·조현명(趙顯命) 형제 등이 대표적인 탕평파였다. 홍치중은 이 때문에 노론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탕평파는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이던 척박한 정치현실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공존을 모색했던 정치세력이었다.

그러나 탕평파의 입지를 좁힌 것은 경종 때 사형당한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신원 문제였다. 소론 좌의정 이태좌가 “지금 한편의 사람들이 벼슬에 나오기 어려운 단서는 네 사람의 관작을 추탈한 데에 있으니, 모두 벼슬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절의(節義)를 삼고 있습니다(『영조실록』 5년 8월 18일)”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이는 극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노론 4대신을 신원시키려면 목호룡의 고변(임인옥사) 자체를 무고로 정리해야 했는데 이는 소론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론과 노론의 탕평파가 타협을 위해 만든 명분이 ‘죄의 경중이 같지 않다’는 분등설(分等說)이었다. 분등설은 경종 때 연잉군을 세자로 건저(建儲)하고 대리청정을 주창한 행위와 임인옥사를 구분해 처리하자는 절충안이었다. 연잉군(영조)을 추대한 경종 때의 세자 대리청정 요구는 충(忠)이지만 임인옥사는 역(逆)이라는 방안이었다. 노론으로서는 세자 대리청정 주청이 역(逆)에서 충(忠)으로 전환된다는 장점이 있었고, 소론으로서는 임인옥사를 여전히 역(逆)으로 묶어둠으로써 이를 처벌한 자신들의 행위를 충(忠)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분등설로 각 당의 탕평파들 사이에는 타협의 공간이 마련되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노론 4대신 중 손자 김성행과 아들 이기지가 임인옥사에 관련되어 사형당한 김창집과 이이명은 신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소론 탕평파 송인명이 “김창집과 이이명은 아들과 손자가 역적이니 죄가 없을 수 없으나 이건명과 조태채는 추죄(追罪)할 수 없으니 분등(分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영조도 “이건명과 조태채는 관작을 복구하는 것이 옳다(『영조실록』 5년 8월 18일)”고 동의했다. 이렇게 두 대신이 신원된 것이 영조 5년(1729)의 기유(己酉)처분이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확산시키기 위해 소론 탕평파 조문명의 건의를 받아들여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인사 원칙으로 삼았다. 인사부서에서 3명의 후보자를 주의(注擬)해서 임금에게 낙점(落點)을 요청할 때 각 당파를 골고루 포함시켜야 하고, 한 부서 안에도 각 당파가 고루 포진해야 한다는 인사원칙이었다. 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을 등용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탕평책은 유지되었으나 노론은 두 대신이 신원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영조는 재위 9년(1733) 1월 19일 노론 영수 민진원과 소론 영수 이광좌를 불렀는데, 『영조실록』은 “임금이 좌우의 근신(近臣)을 물리치고 주서(注書)에게는 붓을 멈추어 기록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사관(史官)에게만 사실을 기록하게 하고 하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날 영조의 하교를 ‘1·19 하교’라고 하는데, 핵심은 경종 때 노론의 행위나 소론의 행위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경고였다. 이날 영조는 “아! 당론(黨論)이 나를 모함하고 당론이 나를 해쳤다”면서 임인옥사 때 자신을 추대한 혐의로 죽은 처조카 서덕수와 자신은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 주장해 자신의 처지 또한 곤혹스러움을 내비쳤다. 이날 영조는 오른손으로는 이광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민진원의 손을 잡고 화합을 종용했으나 당쟁은 그치지 않았다. 영조는 재위 13년(1737) 8월 18일 인정문(仁政門)에 나가 백관에게 ‘혼돈개벽(混沌開闢)’ 유시(諭示)를 내린다.

“아! 당습(黨習)의 폐단이 어느 때야 없어지겠는가?…오호라! 우리나라는 그 명목(名目:당색)이 서로 바뀌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그 폐단이 더 심해서 처음에는 군자(君子)라 하다가 뒤에는 충(忠)이라고 하며, 처음에는 소인(小人)이라 하다가 뒤에는 역적(逆賊)이라고 서로 공격했다.(『영조실록』13년 8월 28일)”
영조는 이날을 기점으로 “이전의 일은 혼돈에 부칠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개벽이다”라면서 어제까지는 노·소론이 싸운 ‘혼돈’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모두가 화합하는 ‘개벽’이라고 유시했다.

그러나 과거사에 매달리기는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영조는 재위 14년(1738) 12월 처조카 서덕수를 신원했다. 서덕수의 할머니이자 정성왕후 서씨의 어머니인 잠성부부인(岑城府夫人:정성왕후의 어머니)이 사망하자 “서덕수는 사람됨이 어리석어 속임을 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중전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신원한 것인데, 이는 임인옥사에 대한 영조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드디어 재위 16년(1740:경신) 1월에는 김창집과 이이명도 신원시켜 노론 4대신 모두의 혐의를 벗겨주었다. 나아가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를 무고로 처분하는 경신처분(庚申處分)을 단행했다.

그러자 연잉군(영조)의 미래를 부탁했다는 숙종의 유조(遺詔)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현명의 문집인 『귀록집(歸鹿集)』에 따르면 영조 16년 인현왕후 민씨의 조카 민형수(閔亨洙)는 조현명에게 “정유독대(숙종과 이이명의 독대) 후에 숙종께서 두 왕자(연잉군·연령군)의 보전을 생각하셔 안으로는 (두 왕자를) 동조(東朝:대비)에게 부탁하고, 밖으로는 대장(大將) 이우항(李宇恒)에게 부탁했다”고 말했다. 민형수는 ‘숙종이 이이명에게 선비(士)를 추천하라고 하자 이이명이 김용택과 이천기를 추천했는데, 숙종이 7언고시를 김용택에게 내렸다’고 덧붙였다. 삼급수 중 숙종의 유서를 이용해 경종을 내쫓으려는 평지수가 실제 숙종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 역모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김용택의 아들 김원재를 국문한 후 숙종의 유시(遺詩)는 김용택이 위조한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영조는 과거사 정리를 계속해 재위 17년(1741)에는 드디어 ‘신유대훈(辛酉大訓)’을 선포한다. 경종 때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은 역모가 아니라 자성(慈聖:대비)과 경종의 하교에 의한 정당한 조치라면서 『임인옥안(목호룡 고변 사건 수사기록)』을 불태우고 이를 태묘(太廟:종묘)에 고하게 한 것이다. 신유대훈은 영조식 과거사 정리의 완결판이었다. 임인옥안에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자신의 전과를 말소하면서 재위 1년(1725)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고 취했던 을사처분으로 회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을사처분이 재위 3년의 정미환국으로 무효가 된 지 14년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을사처분이 일방적 선언이었다면 신유대훈은 소론의 동의를 받아낸 점이 달랐지만 비생산적인 과거사 집착이란 점은 마찬가지였다. 임인옥안을 불살랐다고 사건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자 군왕의 평가는 옥안(獄案)의 등재 여부가 아니라 재위 시의 업적에 의한다는 사실도 간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