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론] 공적자금 국회동의 거쳐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금융구조조정은 원칙을 필요로 한다.

정부 당국이 원칙을 분명히 하고 이에 충실할 때 시장에 대해 권위를 가질 수 있으며, 제대로 된 금융구조조정을 추진할 힘을 얻게 된다.

금융구조조정은 단순히 부실을 처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시장규율과 질서를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금융구조조정은 또한 비전을 필요로 한다. 구조조정은 과거의 제도와 관행에 병든 금융기관들을 수술하거나 퇴출시키고 새로운 금융제도와 금융산업구조를 구축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지난 2년간의 우리 금융구조조정이 부실공사로 평가받게 된 것은 바로 정부가 원칙에 충실치 못하고 분명한 비전 없이 시장상황과 정치환경에 떠밀려 구조조정을 해온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원칙이 분명치 않은 경우 금융기관들은 시장불안을 인질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내는 게임을 하려 들며, 이에 끌려 들어간 정부는 결국 금융기관들의 도덕적 해이만 부추기고 공적자금을 낭비하고 만다.

구조조정이 가시적 성과와 정치적 일정에 이끌릴 경우 미봉책으로 일관하거나 금융기관의 부실에 대한 정확한 실사를 외면하고 경영혁신에 대한 확실한 담보 없이 공적자금이 투입돼 이 역시 사후적 낭비로 귀착되고 만다.

지금도 정부 당국은 금융구조조정의 원칙과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시장과 분명하게 대화하고 있지 않다. 금융부실의 정도가 깊어 시장자율적 구조조정에 의존해서만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도 이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어느 나라인들 공적자금이 아깝지 않고 국민부담이 두렵지 않아 이를 투입해 금융구조조정을 하려 들겠는가.

부실의 정도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 시장을 통한 부실채권의 처리와 자본증액이 불가능해지거나 가능하더라도 조달비용이 너무 높아 해당 금융기관의 정상화를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주가가 액면가의 반에도 훨씬 못미치는 금융기관들이 어떻게 시장에서 증자를 할 수 있을 것이며 운용수익보다 더 높은 금리로 조달한 후순위 채권이 금융기관 정상화에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오래 지속되면 될수록 시중자금의 단기화와 금융불안은 심화되며 기업재무구조 취약화 등 경제에 대한 주름은 커지게 마련이다.

최근 공적자금의 조달규모와 방식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나 공적자금은 가능하면 빨리 국회의 동의를 얻어 충분히 동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금융구조조정 비용을 투명화하고 이의 필요성에 대한 공론화 과정을 통해 원칙을 보다 분명히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부실이 깊은데도 공적자금이 없다면 결국 당국은 위기관리를 위해 비교적 건전한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부실금융기관을 강제로 지원토록 하고 그만큼 건전성 감독기준 적용을 완화해줘 궁극적으로 부실을 금융부문 전반에 퍼지도록 해 사후 조정비용을 더 늘리게 된다.

혹은 다른 공공관리기금의 전용이나 금융기관 차입 등의 편법적 수단에 의존해 결국 똑같이 국민들의 부담으로 귀착되면서도 그 비용이 얼마인지, 제대로 쓰였는지도 모르는 무원칙.무책임의 구조조정이 되기 쉽다.

이것이 외환위기 이전에 우리가 익숙히 해왔던 방식이며 최근 들어 다시 살아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금융구조조정 과정은 때로 철저한 비밀과 보안 유지를 필요로 한다.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거나 잘못된 소문이 돌 경우 해당 금융기관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거나 금융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국은 거의 절대적인 재량권을 가지고 구조조정을 해나가야 하며 국회나 다른 기관에서 사전적인 투명성을 지나치게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공적자금 투입은 국민 부담을 수반하게 되므로 이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투입대상 금융기관의 경영혁신과 자구계획 이행에 대한 사후관리는 철저히 이뤄졌는지 사후적인 검증과 평가는 국민의 권리다.

초기 시행착오는 불가피했을지 모르나 이것이 추후 똑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부는 공적자금 추가투입 불가피성이 확인된 이상 이를 가능한한 빨리 국회의 동의를 얻어 조달하고 분명한 원칙과 방향 설정 아래 근본적인 금융구조조정을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