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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쇼와의 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989년 1월 7일 새벽, 역대 최장기간인 63년간 재임했던 히로히토(裕仁)일왕이 사망했다.

일본열도는 곧바로 추모 분위기에 휩싸였고, 외국인 관찰자나 일부 일본인이 '하루아침에 민주국가에서 군주국으로 바뀐 듯하다' 고 말할 정도로 매스컴들도 고인을 애도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쇼와(昭和)를 연호로 사용했던 히로히토가 사망함에 따라 일본 정부와 학자들은 관례대로 중국 고전을 뒤져 새로 즉위할 아키히토(明仁)왕세자의 연호를 '헤이세이(平成)' 로 결정했다.

새 연호를 준비하고 발표한 관방장관은 바로 며칠 전 타계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전 일본총리였다.

근대 일본은 천황의 연호로는 메이지(明治.1868~1912년), 다이쇼(大正.1912~1926년), 쇼와(1926~1989년), 그리고 현재의 헤이세이로 나뉜다.

고대국가 때부터 따지면 현재의 연호는 2백47번째에 해당한다. 연호에 쓰인 한자 '明治' 는 주역에서, '平成' 은 사기(史記)와 서경(書經)에서 각각 따온 글자다.

'昭和' 는 서경의 '백성소명 협화만방' 에서 두 글자를 택해 지었는데, 제국주의 일본이 꼭두각시 나라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오족협화(五族協和)' 를 외쳤던 것을 상기하면 이름 자체에서 군국주의.파시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히로히토 사망후 일본 정부는 그의 생일인 4월 29일을 휴일로 하기로 하고 갖가지 명칭을 검토했다. 고인이 해양생물학자이기도 했다는 데서 '과학의 날' , 매년 봄마다 나무심기에 열심이었으니 '미도리(녹색)의 날' , 그밖에 '환경보전의 날' '복지의 날' '지방자치의 날' 등 아이디어가 많았으나 최종적으로 미도리의 날로 결정됐다.

'쇼와의 날' 이나 '쇼와기념일' 로 하자는 주장도 많았지만 일체의 정치색을 없앤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논외로 밀려났다.

지난 12일 일본 참의원은 미도리의 날을 '쇼와의 날' 로 바꾸는 법안을 야당의 반대속에 가결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본의 쇼와시대는 식민지 수탈과 억압, 중국침략, 태평양전쟁과 강제징용.종군위안부 등의 시대이기도 했다.

히로히토 사망 직후 여론조사에서 일본인들도 쇼와시대에 대해 패전 이전은 '나빴다' (73%), 패전 이후는 '좋았다' (89%)가 압도적이었고 '쇼와' 의 이미지로는 '전쟁' (26%)이 가장 많았다.

기념일 명칭 변경은 일본의 보수우경화 조짐의 한 방증이랄 수 있다. 마침 모리 요시로 총리도 그제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 라고 발언해 파문을 빚고 있다. 군국주의 일본에 향수를 품고 한 말이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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