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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24시] '식은 피자'의 뜨거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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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일본 민방들은 15일 전날 타계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전 총리 특집을 다뤘다. 내용은 거의 인품의 오부치에 관한 것이었다.

한 방송은 지난 1월 생방송 도중 걸려온 오부치의 전화를 몇차례나 내보냈다. "오부치입니다" 로 시작되는 부치폰 얘기였다.

화제는 끊이지 않았다. 우정성 정무차관 시절의 하루 우편배달부 모습, 무청(카부)을 쳐들고 "주식(카부)값 올라라" 하고 외치던 장면, 방사능 누출사고 지역의 농산물로 만든 음식을 들며 "맛있다" 를 연발한 것 등등. 생전의 소탈한 면모들이다.

무엇보다 별명에 얽힌 일화가 만발했다. 빌딩가의 라면집, 식은 피자, 범인(凡人), 진공총리, 둔우를 비롯한 별명들은 곧 오부치의 정치역정이었다.

방송에는 그와 사귀었거나 만났던 각계 인사의 담화도 소개됐다. 모두 진솔하고 스스로 몸을 낮췄던 고인의 인품 얘기로 채워졌다.

일본이 잔잔한 추모 분위기다. 다음달의 총선에서 오부치의 동정표가 변수로 등장할 만한 상황인 셈이다.

야당이 오부치를 치료한 의사단의 회견을 계기로 불투명한 후계선정 과정을 추궁키로 한 것은 가까스로 얻은 맞불작전의 호재다.

그러나 인품의 오부치는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훗날 그는 오히려 정책의 오부치로 기억될지 모른다. 뚜렷한 색채가 없어 진공총리나 관료가 써준 원고를 읽는 대독(代讀)총리로 불렸지만 그는 재임 중 많은 일을 해냈다.

한 신문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전후 시스템을 재구축하고 21세기 일본의 기초를 다졌다" 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국가기능과 안보의 강화는 두드러진다. 검.경의 도청수사를 가능케 하고, 국민의 동태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한 새 주민기본대장법, 일장기.기미가요(君が代)를 국기.국가로 하는 법 등을 제정했다.

지하철 테러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의 활동을 봉쇄하는 단체규제법도 만들었다. 치안법 정비의 성격이 짙은 것들이다.

주변사태법 제정을 통해 자위대의 활동반경을 넓혔고 방위력을 증강했으며 국회에 헌법조사회를 설치해 개헌 논의의 물꼬를 텄다.

모두 찬반논란이 거셌지만 오부치는 거대여당, 수의 논리로 밀어붙였다.

정책의 밑바닥을 흐르는 기류는 보통국가 일본이요, 강한 일본이었다. 보수파 학자들이 오부치를 1급 재상으로 치켜올리고 극우성향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도쿄도지사가 "그와 더불어 할 일이 많았는데…" 라고 한 데서도 오부치 전 총리의 우파 행보가 엿보인다.

그가 재임 중 이룬 일은 머잖아 주변국에 새롭게 다가갈 것이다. 주변국들은 오부치 전 총리가 남긴 것들을 찬찬히 되짚고 따져봐야 한다.

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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