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킬리만자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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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쟎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영화 '킬리만자로' 는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에 나오는 가사처럼 비루한 현실에서 뭔가 '큰 것' 을 꿈꾸는 사내들에 관한 이야기다.

만년설로 덮힌 킬리만자로에서 먹이를 찾아 어슬렁대는 표범처럼 절대 고독을 안고 사는 사내들.

이들은 비록 왜소하게 살아가지만 저마다 세상에 나온 '몫' 을 하려는 열망에 싸여 있다.

그런 열망이 현실의 벽에 부딪쳐 튕겨나올 때 터져나오는 외마디 비명은 처절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 해식(박신양)과 해철은 쌍둥이 형제.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증오할 만큼 각자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해식은 악랄한 수사 방식으로 악명 높은 경찰. 동생 해철은 한 때 주문진에서 알아주는 보스였으나 밀고한 배신자로 오해받고 서울로 도피해 온 깡패출신이다.

동생은 집안을 팽개치고 자기만 아는 형에 대해 적개심으로 차있고, 형은 못된 짓만 골라하는 동생을 원수처럼 대한다.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며 궁핍하게 살아가던 동생 해철이 자식의 병원비때문에 형에게 손을 내밀지만 내정히 거절할 정도다.

가난을 견디지 못한 동생은 형의 총으로 형이 보는 앞에서 자식들을 죽이고 자살한다.

이 사건으로 경찰직에서 쫓겨난 해식은 동생의 유골을 안고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 주문진으로 향한다.

그는 주문진에서 번개(안성기) 등 과거 동생의 같은 패들과 만나면서 해철의 삶을 이해해간다.

하얀 눈 밭에 빨간 피자국을 남기며 사라지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결국 형사나 깡패라는 세속적인 직업의 차이를 초극해, 꿈을 쫓아 헛되이 달려온 사나이들의 쓸쓸한 삶에 대한 애가(哀歌)가 된다.

오승욱 감독의 데뷔작 '킬리만자로' 는 멜로나 코미디 같은 연성물이 주류를 이루는 충무로에서 오랜 만에 만나는 남성적인 영화다.

검붉은 피가 방 안을 가득 채우면서 해식의 얼굴이 클로즈 업되는 첫 장면부터 영화는 광고 문구처럼 '피빗 누아르' 다.

그러나 인물들의 행동 동기가 모호할 뿐더러 이야기의 마디들이 허술하게 연결돼 있어 감독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왜 형이 느닷없이 동생의 삶을 이해하기로 작정한 것인지, 주문진을 주름잡고 있는 깡패들과 조우한 해식이 왜 끝까지 무력하게 대응하는지 등등.

더구나 불필요하게 등장하는 과도한 폭력 장면과 디테일한 묘사의 엉성함 등은 이전에 나온 '깡패영화' 가 이룬 성과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정제되지 않은 새디즘이 누아르는 아니다.

20일 개봉.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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