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성모원' 원장 정을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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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3일 별세한 '성모원' 원장 정을순(鄭乙順.여.72)씨는 35년간 나환자들과 생을 같이 한 대모(代母)이자 벗이었다.

동시에 전쟁고아.부랑아들을 자식같이 돌본 사회사업가였다.

신태성(愼泰晟.58)마산지역발전연구소장은 "고인의 삶은 평범함에 내재된 무한한 사랑의 힘을 보여 준 것" 이라면서 "항상 검은 치마를 입고 씩씩하게 활동하던 고인의 모습이 아련하다" 고 애통해 했다.

鄭원장이 경남 거창군 거창읍에 있는 음성나환자 마을인 성모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골 아낙이었던 鄭씨의 삶에 굴곡이 온 것은 남편 문수길(文秀吉)씨가 1951년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부터. 결혼 6년만에 24세의 나이로 '청상과부' 가 된 鄭씨는 한국전 와중에 세살박이 아들과 함께 고달픈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호주 여선교사인 전은혜씨가 운영하던 전쟁미망인 수용소 '모자원' 을 맡게 됐다.

미망인들이 재봉기술을 익혀 자립해 나가자 그녀는 전쟁고아와 넝마주의.부랑아들을 받아들이고 이 시설을 '희망원' 으로 개칭했다.

"청상과부가 사회사업을 잘한다" 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거창군은 성모원을 맡아달라고 鄭씨에게 부탁했다.

당시 성모원에는 몇몇 남자 원장이 부임했으나 석달을 넘기지 못하고 손을 들고 나가자 鄭씨를 적임자로 판단한 것이다.

65년 鄭씨가 원장으로 취임한 뒤 성모원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다.

고인은 먼저 사람들의 편견과 싸웠다.

나환자 아이들의 등교를 거부한 인근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해 결국 성모원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줬다.

재정자립을 위해선 직접 양돈사업에 나섰다. 읍내 식당을 돌아다니며 돼지먹이를 구한뒤 이를 유모차에다 실어 날랐다.

여성으로 험한 일을 하다보니 시련도 클 수 밖에 없었다. 희망원 시절에는 부산에서 구호물자를 타오다 넝마주의들에게 납치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鄭씨는 "너희들이 양아치면 나는 양아치 엄마다" 라고 당당히 버텼고, 그들도 혀를 내두르며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71년에는 성모원의 재정자립을 위해 집을 담보로 잡히고 뽕나무를 사들였다가 망해 단칸셋방에 나앉기도 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결국 19명이 전부이던 성모원은 32가구 1백2명 나환자 가족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했다.

성모원 주민 양영모(梁榮模.65)씨는 "나환자들을 위해 자기 재산까지 쏟아가며 은혜를 베풀었던 분" 이라고 회고했다.

나환자들에겐 정성을 베풀었으나 자식에게는 엄격했다고 한다.

아들 문연식(文連植.52.현대건설이사)씨는 "자립심을 키우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등록금도 주지 않을 정도였다" 고 전했다.

지난 5일 거창읍 용산리의 양지바른 기슭으로 향하는 그의 운구는 성모원의 나환자 50여명에 의해 운반됐다.

홀로 된 몸으로 긴 고행을 마치고 49년만에 남편 곁에 눕게 된 순간이었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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