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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후계 구축 갈림길에 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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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이 평양 시내의 조선무역은행에서 ‘인민생활공채’를 구입하고 있다.

“압록강에 휴지조각이 된 북한 구권 화폐가 둥둥 뜰 것-.”

북한 화폐개혁 후폭풍 어디로… #당 간부·신흥 부유층 반발이 변수 … 주민은 지지 가능성도

“혜산에서는 장사하던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통곡했다.” 이런 ‘데일리 NK’ 보도는 북한 내부의 혼란상을 엿보게 하기 충분하다.

북한 경제에 메가톤급 파장을 던진 이번 조치는 ‘깜짝쇼’를 구사하는 김 위원장의 통치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통치술은 경제부문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김 위원장은 공장이나 협동농장 같은 경제현장을 찾는 ‘현지지도’를 즐긴다. 문제점이 포착되면 가차없이 일벌백계한다. 2008년 12월 남포시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방문 때의 일이다. 김 위원장은 우리의 포스코에 해당하는 대표적 철강생산 공장의 근로자 식당에 들어서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식당이 추운 데서는 아무리 영양가가 높은 식사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는 “식당 식사칸의 온도를 양력설 전까지 정상 상태로 올려놓으라”고 지시했다. 김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고위 간부들이 근로자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잘못을 비는 ‘사죄모임’이 열렸다는 게 평양방송의 보도다.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화폐개혁이 김정일 위원장의 최종 결심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분석한다.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 누적돼 온 문제점을 반영해 결단을 내렸다는 얘기다. 7·1조치로 근로자 월 평균 임금이 100원에서 3000원으로 조정됐지만 뛰는 물가에 경제는 몸살을 앓았다.

쌀 1㎏이 2200원에 달했고 두부 한 모가 500원 했다. 공식 환율은 달러당 140원대였지만 암달러는 3800원까지 뛰었다. 월급이 1달러에 못 미치는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사(私)경제가 번창하면서 주민들이 직장일보다 개인장사에 치중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부업을 하려 간부에게 돈을 바치고 결근하는 경우가 많아져 공장·기업소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화폐개혁이 김정일 위원장의 최종 결심

기은경제연구소 조봉현 연구위원은 “임금이 20~30배 상향 조정되고 인플레이션이 나타난 상황에서 화폐개혁은 당연한 수순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에 공개된 일부 새 지폐의 발행연도가 2002년으로 돼있는 것도 7·1조치에 맞춰 화폐에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가하려 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화폐개혁의 충격파를 의식해 시기를 고심한 흔적도 있다. 2004년 8월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은 북한 관리의 말을 인용해 “새로운 화폐 발행과 디노미네이션(화폐 액면절하)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한다”고 보도했다. 양창석 통일부 정세분석국장은 “화폐개혁은 첩보 형태로 올 들어서도 꾸준히 제기됐다”고 말했다.

아무튼 화폐개혁 단행은 7·1조치를 사실상 철회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로써 김 위원장은 2002년 9월 내놓은 신의주 경제특구 건립계획이 물거품 된 데 이어 7·1조치도 무산되는 등 경제개혁 구상이 잇달아 벽에 부닥치는 상황을 맞았다. 정부는 당초 “첩보 등을 통해 정황을 파악하고 있지만 공식 확인할 상황은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신권 화폐를 입수해 사진과 함께 보도하면서 최종 확인됐다. 이처럼 신중한 태도를 보인 건 무엇보다 북한 당국의 공식발표가 없었다는 점에서다. 1947년 12월 첫 화폐개혁 때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차례는 모두 당일 노동신문을 통해 ‘중앙인민위 정령’(政令) 같은 근거가 대내외에 발표됐다.

관계당국이 잠정 파악한 북한의 화폐개혁 움직임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구권과 신권의 교환비율은 100대 1로 결정됐다. 둘째, 가구당 구권 기준 10만원 선으로 한도액을 정했다. 셋째, 나머지 보유금액은 저금소에 예치토록 했다. 100대 1의 교환은 1959년 2월 2차 화폐개혁 이후 50년 만이다.

당시는 6·25전쟁 이후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고 전후 복구에 필요한 재원 확보에 주안점이 두어졌다. 가장 최근인 1992년 4차 화폐개혁을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1대 1의 교환비율이었다.

가구당 10만원 선이란 교환 한도는 다소 정보가 엇갈리고 있다. 당초 10만원으로 정했다가 15만원으로 올렸다는 설이 나오는가 하면 10만원은 구권과 신권을 100대 1로 교환해주고 추가 10만원을 1000대 1로 바꿔준다는 이야기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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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달 치 생활비 남겨두고 사실상 개인 돈 몰수

이런 방식으로 20만원을 모두 교환한다면 우선 10만원은 100대 1 비율에 따라 1000원의 신권으로 주고, 나머지 10만원은 1000대 1로 계산해 100원만 주는 방식이다. 20만원을 1100원으로 환산해주는 방식이 된다. 정부 당국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4~5인 가구 월 생활비는 5만원 수준이다. 결국 한두 달 치 생활비만 남겨두고 사실상 몰수하는 셈이다.

나머지 돈은 국가로 환수하거나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는 점에서다. 이런 조치는 화폐 가치의 하락으로 나타난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주안점이 두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장롱 속에 묻어둔 돈을 거둬들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다 부정축재한 신흥 부유층을 겨냥한 측면도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에는 돈주, 회령엔 달러 돈궤 아바이’란 말이 유행한다. 엄청난 자금을 보유한 자본가나 달러 부자를 지칭한다. 2004년 평양 중구역에 노동당 고위 간부용 60평형 아파트를 지을 때 벌어진 일은 이들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당이 건설 자금 부족으로 3만5000달러에 일반 분양을 했는데 돈주들이 너도나도 나선 것이다.

북·중 국경인 회령시에서도 달러로 돈궤짝을 채울 정도의 부유층이 생겨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화폐개혁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이번 조치 후 평양은 물론 지방 도시들에서는 물건 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혼란상이 나타나고 있다. 쌀은 ㎏당 3만~4만원(구 화폐체계 기준)까지 올랐다.

월급으로 쌀 2㎏도 살 수 없던 과거도 어려웠지만 앞으로는 더욱 문제일 것이란 지적이다. 국영상점엔 물건이 없고 사설시장은 가격이 비싸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은 화폐개혁이 아니라 상품공급이 늘어야 고쳐진다는 것이다. 임강택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경제학 박사)은 “직격탄을 맞은 중소상인 등의 경우 달러나 위안화로 자산을 보유하려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외화자산을 보유한 사람들은 피해를 거의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향후 당국이 외환보유에 대한 통제조치를 추가로 취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화폐개혁으로 남북경협이나 교역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란 게 정부 당국의 판단이다.

개성공단 임금지급 등 거의 모든 거래가 달러를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남한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화폐개혁 발표 직후 ‘김정일 피격사망설’이 나돌아 증시가 잠시 출렁했던 것 외에는 없는 상황이다.

노동당 통제 강화와 3남 김정은 통치력 확보

북한의 화폐개혁이 성과를 거둘지, 아니면 체제불만과 혼란으로 역풍을 맞을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김정일 위원장이 승부수를 던진 건 위험요소를 지탱해 낼 뒷심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수 있다. 당 간부나 신흥 부유층의 반발과 달리 상당수 일반 주민은 지지할 가능성도 일각에서는 제기한다.

‘다같이 못사는 건 괜찮다’는 식의 균빈(均貧)의식에 익숙했던 주민들은 7·1조치 이후의 빈부격차에 불만을 제기해 왔다고 한다. 과거의 화폐개혁 때도 일부 불만이 나타났지만 수습됐다. 하지만 배급제가 주축이던 김일성 시대와 달리 이제는 화폐의 의미가 개인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주민들에게 절대적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당장 공안기관의 힘에 눌려 입을 열지 못해도 북한 경제를 움직이는 신흥 자본가들이 체제불만을 키울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개혁이 실패할 경우 실무진들을 숙청하는 방식으로 김 위원장은 책임을 비켜갈 수 있다. 당국은 화폐개혁의 실무라인을 노동당 계획재정부(부장 박남기) 쪽으로 보고 있다.

김 위원장은 권력승계 이후 잇단 흉년으로 식량문제가 심각해지자 서관희 노동당 비서 등 농업담당 라인을 간첩혐의로 몰아 공개 처형해 민심을 수습했다. 주목할 대목은 김 위원장이 셋째 아들 김정은(25)으로의 후계 구축을 준비 중이란 사실이다. 황진하 한나라당 제2정책조정위원장은 “경제개혁이 아니라 지배체제 재구축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정권 통제를 벗어나려는 시장경제 체제가 형성되자 노동당 통제를 강화하고 3남 김정은의 통치력을 확보하기 위해 단행했다는 풀이다.67세인 김 위원장은 지난해 8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몇 달 만에 재기했지만 통치활동에 대한 자신감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게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군부대·산업현장 방문 같은 공개활동 보도 횟수가 지난해보다 70% 이상 늘었지만 속사정은 다르다는 관측도 나온다.정부 당국자는 “핵실험이나 오바마 행정부와의 대미접근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화폐개혁도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얼마나 온전히 통치권력을 넘겨주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이미 경제생산을 독려하는 ‘150일 전투’를 끝냈고, 연말까지 ‘100일 전투’를 벌이고 있다. 김 위원장은 2012년을 ‘강성대국 진입의 해’로 공언했다. 2년 뒤로 다가온 시한을 감안하면 대외정책은 물론 먹고사는 문제에서 성과를 거둬야 하는 절박한 입장이다. 화폐개혁은 김정일 체제와 그 후계구도의 성패를 좌우할 시금석이 될 수 있다.

“북한 화폐를 잡아라” 정보기관·언론 한때 각축

새 지폐 입수 경쟁

이코노미스트 “새 화폐에 김정일 후계자 김정은의 사진이라도 등장한다면 대박 아닙니까?”

한 일본계 방송사의 서울주재 기자는 “북한 후계자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신권 화폐에 대한 일본 언론의 관심이 폭발적이었다”고 말했다. 북한이 새로 발행한 지폐를 입수하기 위해 정보당국과 언론사들이 한판 전쟁을 치른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4일 공개된 지폐에 김정은 얼굴은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도 등장하지 않았다.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의 타이틀 롤을 맡았던 인민배우 홍영희가 일찌감치 지폐의 도안인물로 올랐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이는 1994년 사망한 김일성을 ‘영생하는 수령’으로 우상화하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어려운 사정에서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신문·방송사는 베이징 특파원을 북·중 국경도시인 단둥으로 긴급 파견하는 등 촉각을 곤두세웠다. 중국으로 나오는 북한 무역상이나 화교를 통해 새 화폐를 입수하려는 계산이었다. 탈북자나 ‘내부 소식통’을 통해 북한 소식을 전해온 비정부기구(NGO)들도 언론으로부터의 잇단 구애에 몸값이 올랐다. 일부에서는 수고비 명목으로 200만원가량의 돈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북한과 ‘특수관계’인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인터넷을 통해 지폐사진을 공개하면서 입수전쟁은 막을 내렸다. 북한의 화폐 제조는 평안남도의 평성상표인쇄공장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926공장’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조선중앙은행 산하 기관으로 철저한 경계와 출입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북한은 100달러 초정밀 위폐인 수퍼노트의 생산국으로 지목 받을 정도로 정교한 화폐 제조술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영종 중앙일보 정치부문 기자·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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