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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헌 옷이 좋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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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저녁 예배가 끝나고 작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자신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챙기느라 벌어진 소동입니다. 먼저 집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그런 일이 있을 때, 아줌마들 특유의 판단력과 손놀림은 거의 본능에 가까워서 소동은 단 몇 분만에 끝이 났습니다.

이번 소동은 미진 엄마의 배려로 이루어졌습니다. 집 정리를 하던 참에, 몸매가 얇은 순영씨에게 줄 요량으로 몇 벌의 옷을 챙겼는데, 정작 순영씨가 입기엔 좀 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사람은 아무나 가져가라는 허락이 떨어졌는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단 몇 분 만에 새 주인들이 정해져 버린 것입니다. 덕분에 저도 황토물을 들인 면 티셔츠 하나를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소동은 우리 교회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닙니다. 미진네처럼, 큰 도시에 나가 있는 친척들이 입지 않는다며 보내오는 옷가지가 제법 많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나눠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옷들 가운데 못 입을 정도의 헌옷은 별로 없습니다. 유명 상표의 옷을 비롯하여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옷이 대부분입니다. 좀 낡았거나 얼룩이 있는 옷들은 일복으로 제격이라 어떤 옷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나눠 입습니다.

덕분에 우리 식구도 옷을 새로 사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즈음에는 새로 살 일이 생겨도 조금 기다려 보는 여유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옷이 필요할 때가 되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들어온다는 확신까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가 입는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큰애가 다섯 살, 둘째 애가 다섯 달인데 그동안 새로 사 입힌 옷이 거의 없습니다. '떨어진 속옷도 괜찮다'는 저의 너스레에 적지 않은 이웃들이 부담 없이 헌 옷을 가져오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헌 옷이 좋습니다. 우선은 공짜로 생기는 것이니까 그 기쁨이 가장 큽니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저의 선택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까닭은 더 있습니다. 새 옷에는 독이 묻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새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 들어가게 마련인 화학물질 때문인데, 최소한 스무 번을 빨아야 그 독성이 없어진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낡고 헌 옷일수록 독성이 없는 무공해 옷이 되는 셈이니 기쁜 마음으로 입을 만합니다.

또 하나, 지구를 위해서 뿌듯한 마음으로 헌 옷을 입습니다. 지구를 오염시키는 물건 가운데 면으로 만든 티셔츠가 손꼽힌다고 들었습니다. 면화를 재배할 때 농약과 제초제를 쓰고 옷을 만들면서 갖가지 화학물질을 쓰는데, 사람들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면 티셔츠를 만들기 때문에 그만큼 지구에 필요 이상의 해를 입히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헌 옷 한 벌을 입는 것은 옷 한 벌을 만드는 데 드는 오염물질을 그만큼 쓰지 않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집 옷장을 열어 보면 예닐곱 해 동안 계속 입어서 목 부분이 느슨해졌거나 세탁기의 센 물살에 구멍이 난 티셔츠가 더러 있습니다. 버릴 때가 되었지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몸에 익숙해진 까닭에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옷이 주는 편안함은 좋은 친구를 둔 기쁨과 견줄 만합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필요 이상으로 쌓아두는 옷도 있습니다. 즐겨 입지 않아서 몇 해째 옷장에 그대로 들어 있는 옷들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옷장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지구를 위한 작은 소동이 우리 교회에서 한 번 더 일어나겠지요. 그러고 보니 둘째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 입던 임신복이 제일 먼저 눈에 걸립니다. 서너 벌 되는 그 옷들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려받았는데, 이제 깨끗하게 세탁된 모습으로 새 주인을 찾아 나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겨우 몇 벌의 옷을 사지 않고 나눠 입는 것이 지구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지만, 큰 강물도 그 시작은 작은 물방울임을 기억하며 자랑스럽게 옷장 문을 열고자 합니다.

추둘란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