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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변방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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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떠오른 것은 순전히 김경미 시인이 보내준 에세이집 '바다 내게로 오다'때문이었다. 바다와 파랑을 주제, 혹은 소재로 여러 단상을 엮어낸 시어들이 신선했다. 청출어람은 쪽(藍)에서 나온 파랑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다. 그러나 난 아직 모르겠다. 쪽빛 바다가 더 파란지, 청명한 가을 하늘이 더 파란지를. 어쨌든 이 말은 흔히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때 쓴다.

비단 스승과 제자 사이만이 아니다. 인류역사를 되돌아 보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뒤늦게 배웠지만 원조(元祖)보다 더 화려하게 빛을 발하는 예가 수두룩하다.

발레가 그렇다. 발레는 이탈리아가 원조다. 13세기 왕족과 귀족들의 사교춤으로 시작돼 16세기 프랑스에 전해지면서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지금은 러시아를 첫 손에 꼽는다.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 비로소 발레가 전해졌지만 서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더 발레를 발전시켰다. 이제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키로프 발레를 빼곤 발레 얘기를 할 수 없다.

이런 예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주자학이다. 송나라 때 주희가 집대성한 주자학은 300년 후 조선에서 전성기를 맞는다. 퇴계와 율곡, 기대승 같은 걸출한 학자들의 치열한 논쟁 속에 조선에서 만개한 주자학은 일본에도 전해졌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미국의 포브스지는 한국이 머지않아 종주국 미국을 제치고 인터넷 최강국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최근 삼성 휴대전화의 성장세를 보면 최강자인 노키아를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분석도 있다. 이 얼마나 통쾌한 변방의 반란인가.

늦게 배웠다는 자격지심에 원조보다 더 노력하고 더 근본적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좋은 것 뿐아니라 나쁜 것도 그렇다는 데 있다. 늦게 배운 도둑질 밤 새는 줄 모르는 격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노조는 본고장인 유럽의 노조보다 더 전투적이다. 물론 독일도 '노조공화국'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노조가 강하다. 그러나 지금 독일 노조들은 전임자를 줄이는 등 자체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과문한 탓인지 우리나라 노조가 구조조정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노조의 '실력'은 통계수치로도 뒷받침된다. 노조의 강성에 통상 반비례하는 노동시장 유연성이 그렇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이 최근 발표한 우리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3.17로 미국(6.37)은 물론, 영국(4.74)이나 일본(5.62)보다 낮다. 지금 추세라면 가장 경직된 독일(1,88)을 따라잡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우리 노동운동의 원조 격인 현대중공업에서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은 아주 다행스럽다.

이 정부의 과거사 처리 문제도 그렇다. 독일은 과거사 처리의 모범국으로 우리의 대선배다. 나치야 어쨌든 제 나라 정권이었으니까 우리 친일과는 다르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은 없었다"는 이른바 아우슈비츠의 거짓말을 하면 최고 5년의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5공 군사독재를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치를 혐오한다. 그런 독일에서도 우리 같은 나치 전력 단죄는 없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 24명이 기소돼 헤르만 괴링 등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뿐이다. 독일의 양심이라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도 나치군 대위로 복무했다. 우리처럼 잘하면 10만명 이상 부관참시할 무지막지한 과거청산은 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천하대란의 시대다. 이러다간 좋은 의미의 청출어람, 유쾌한 변방의 반란마저 물거품 되는 것은 아닐까.

유재식 문화스포츠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