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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열혈 팬 두 딸은 무대 함께 만들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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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오세훈 시장 부인으로 잘 알려진 송현옥(48) 교수. 하지만 연극계에서는 그런 사적인 면보다 연극·평론과 희곡 창작 공부로 탄탄하게 실력을 다진 후 연출가로 변신한 그의 실력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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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된 공간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연극의 매력” 이라고 말하는 송현옥 교수.

송현옥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는 올해 <햄릿q1><폭풍의 언덕><세 여자의 접시 쌓기><담배연기의 꿈><그때는> 등 5편의 연극을 선보이며 연출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꽉 짜인 일정 속에서도 아내의 공연만은 꼭 챙긴다.

연극 연출가 송현옥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

모든 공연을 빼놓지 않고 관람한 열혈 팬이다.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데다 바람까지 매섭던 지난 11월 15일 서울 청담동 공연장 유씨어터는 좌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열기로 훈훈했다. 송 교수가 연출을 맡은 <그때는>의 마지막 공연 날이다. 공연은 세계적인 극작가며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헤럴드 핀터의 작품을 소개하는 ‘제7회 핀터페스티벌’ 중 하나다.

<그때는>은 부부와 친구 사이를 조명한다. 주인공 딜리와 케이트는 20년 된 부부다. 이들에게 20년 만에 케이트의 룸메이트였던 친구 애나가 찾아오면서 극이 시작된다. 연극에 빠져들수록 애나와 케이트가 단순한 친구였을까? 딜리와 애나는 정말 모르는 사이였을까? 아니면 애나는 부부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인가 등 의문이 늘어난다.

가장 가까워야 할 배우자는 물론 친구가 점점 낯선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케이트를 두고 딜리와 애나가 끊임없이 파워 게임을 벌인다는 점이다. 국내에서도 난해한 작가로 유명한 핀터의 작품은 관객을 혼돈 속으로 모는 게 특징이라고 송 교수는 설명했다.

“마치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는 예쁜 커피잔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선반을 열었는데 족제비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핀터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이념, 사상, 관념 등이 꼭 절대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참된 진실이란 없다는 거예요. 진실은 현재 힘이 있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그림이라는 거죠.”

연극은 원작에 충실하면서 주인공의 시선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비디오 카메라를 사용했다. 극 중간마다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을 비췄다. 서로를 바라보고, 은밀히 훔쳐보고, 견제하는 눈빛이다. 송 교수는 카메라에 비친 시선 이동으로 인물 사이에 파워 게임이 벌어지고 있음을 표현했다.

핀터는 그에게 특별한 작가다. 사실주의 드라마에 관심이 많았던 그를 희곡으로 방향을 바꾸게 했다. “수많은 작품을 공부했지만 핀터의 작품은 모르겠더군요. 난해한 작품 세계로 인해 도전정신이 생겨났죠. 대학원 박사과정에서는 아예 핀터 작품 연구에만 매달렸어요. 그리고 2005년 드디어 <해럴드 핀터의 작품세계: 게임의 극화>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연극 연출을 맡은 것은 아니다. 대학 졸업 후 공부를 하며 그가 처음 택한 일은 연극 평론이었다. 1989년 한국 연극지에 칼럼을 시작하면서 데뷔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아이 키우며 대학원 공부를 하는 그가 하루 두 번 정해진 연극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연극 대신 틈나는 대로 볼 수 있는 영화 쪽으로 옮겨 3년간 칼럼을 썼다. 그는 영화 평론을 하면서 자신이 연극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연극은 한정된 공간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무대 도구 하나에도 영화 속에서 수없이 스쳐간 장면이 압축되고 상징하죠. 게다가 연극은 할 때마다 공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연극의 3대 요소인 무대, 배우, 관객의 소통 방식에 따라 새로운 공연이 되는 거죠.”

본격적으로 연출가로 나선 것은 2005년 핀터 작품 <핫 하우스>의 연출을 맡으면서부터다. 이후 <폭풍의 언덕><오델로><물동이전><파우스트><한여름 밤의 꿈><하녀들> 등 수십 편의 공연을 선보였다. 특히 그가 각색하고 연출을 맡은 <폭풍의 언덕>은 인기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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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교수가 연출한 <그때는>의 공연 장면.

2006년 무대에 올린 뒤 관객 반응이 좋아 매년 선보이고 있다. 서울뿐 아니라 성남, 울산, 마산 등 지방에서도 공연했다.

연극업계에서는 송 교수의 공연을 “여성적이고 섬세하다”고 평가한다. 대사 위주의 국내 연극과 달리 그의 작품엔 무용적 요소가 많다. 예를 들어 <폭풍의 언덕> 속 여자 주인공 캐서린은 유령이다.

그는 대사로 표현하지 못하는 캐서린의 감정을 춤으로 표현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무용에 관심이 많았어요. 무엇보다 공연 예술은 TV 드라마나 영화 속 연기와 달리 사실에 국한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또 어떤 장면에서는 수많은 대사보다 몸의 움직임이 관객들에게 즉각적으로 정서가 전달되기도 하고요.”

결론을 매듭짓지 않는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극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순전히 관객의 몫으로 돌렸다. “요즘 젊은 세대는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인터넷 정보 탓인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정보를 선별해 받아들이는 게 안타까웠죠. 그래서 관객이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송 교수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는 가족이다. 오 시장은 송 교수의 공연을 본 후 조언을 잊지 않는다. 오 시장이 가장 감명 깊게 본 작품은 지난 10월 선보인 <담배연기의 꿈>이라고 한다.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가 발표한 희곡 <밑바닥에서>를 각색한 작품으로, 가난하고 병든 밑바닥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공주택에 순례자가 찾아오면서 생기는 이야기다.

오 시장은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와닿고 공연을 본 후에도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두 딸도 마찬가지. 이화여대 무용학과를 졸업한 첫째 딸 주원씨는 송 교수가 연출한 <폭풍의 언덕><세 여자의 접시 쌓기> 등에 배우로 나섰다. 무용수로서 연극을 경험하면 감정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송 교수가 직접 권유했다.

딸의 도움도 받았다. 무용을 전공한 딸이 배우들의 몸 훈련을 지도하고 안무를 짜기도 했다.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인 막내 승원씨는 모니터링 담당. 어렸을 때부터 독립영화, 인디밴드 등 문화에 관심이 많은 승원씨가 가족 중에서도 송 교수의 연출 의도를 가장 잘 파악한다고.

요즘 그는 새로운 공연을 선보일 때마다 막내딸의 의견부터 들어본다. 처음 송현옥 교수를 만나면 대부분 서울시장 부인으로 인사한다. 하지만 10분만 얘기를 나눠보면 그의 연극 열정에 빠져든다. 송 교수는 “남편의 가치관이나 신념은 존중하지만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를 잘 모르겠다는 것. 그는 가장 자신 있는 일을 하는 게 남편을 돕는 거라며 앞으로 연극 연출에만 몰두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는 지난해 세종대 연극영화과 졸업생 10여 명과 극단 ‘물결’을 만들었다. 끊임없이 퍼지는 잔잔한 물결처럼 관객들에게 감동의 물결을 줄 계획이다.

글 염지현 기자·사진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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