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전 장비입찰 이양호 전국방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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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방부가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 사업과 관련, 성능시험을 위한 해외평가단을 보내기 한달 전인 1996년 4월 5일 당시 이양호(李養鎬)국방부장관은 린다 김에게 두장짜리 자필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당시 미국에 있었던 린다 김이 이틀 전 李씨의 조카 정모씨를 통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마침 이날 저녁 李씨는 주한 이스라엘대사 초청 만찬에 참석하기로 돼 있었다.

李씨는 편지에서 '오늘 저녁 만찬에서 쏘바를 만날 것이오. (어제 내 사무실에 다녀갔음)쏘바에게 린다가 핸들링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어' 라고 적고 있다. 李씨와 린다 김에 따르면 쏘바는 이스라엘 장비 판촉에 관여하고 있던 이스라엘 대사관의 외교관이었다.

李씨는 이와 관련, "당시 린다 김이 전자전 장비 도입사업에 개입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했던 것 같다" 며 "96년 6월 만났을 때 그가 이 사업에 관해 물어보길래 장관 마음대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편지 내용을 보면 李씨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李씨는 편지에서 '쏘바에게 답을 주지 않고 린다를 통해서 하겠다' 고 적어, 국방부와 이스라엘 사이의 창구 역할을 린다 김에게 맡길 것임을 암시했다.

더구나 '지난번 말한 계획대로 추진할테니까' 라는 부분은 두 사람이 장비도입을 놓고 이미 이야기를 나눴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李씨는 또 편지에 '계약맺는 대로 연락하라' '사인 끝나면 서울에 와서 설명하며…' 등의 지시와 조언을 적었다.

이와 관련, 李씨는 취재팀과 세번째로 만난 지난달 28일 "이 편지는 모두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 사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고 시인했었다.

하지만 네번째 만난 지난 1일 李씨의 말이 약간 달라졌다. 그는 "일부 내용은 백두사업을 언급한 것" 이라고 해명한 것이다.

린다 김도 지난달 30일 취재팀과 만난 자리에서 "편지 가운데 '계획' '계약' '문서' '사인' 부분은 모두 백두사업에 관한 것" 이라며 李씨와 비슷하게 설명했다.

李씨는 "자신이 이스라엘측을 염두에 둔 것은 린다 김의 로비 때문이 아니라 95년 8월 자신이 국방부장관 자격으로 이스라엘을 방문, 라빈 총리와 만나 양국간의 방위산업 기술교류를 논의했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당시 황명수 국방위원장마저 '이스라엘 장비도 좋다고 하니 그쪽 사람들도 만나보라' 고 당부한 상황이었다" 고 당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는 특히 "전자전 장비 사업을 결국 이스라엘이 아닌 프랑스 업체가 차지한 것이 바로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린다 김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방증"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李씨가 96년 10월 비리 혐의로 구속되면서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다음해 2월엔 이스라엘이 제외된 채 독일.프랑스 업체만을 상대로 재입찰이 실시됐고 결국 프랑스 회사로 낙찰됐다. 당시 이스라엘 업체가 재입찰 대상에서 제외된 데는 성능평가단이 이스라엘 체류 중 일으켰던 향응접대 등의 잡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업체가 탈락한 사실을 자신이 린다 김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방증으로 제시하는 李장관의 해명은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

채병건.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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