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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단일 민족의 불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구상에서 한국같이 온전한 단일민족국가도 없을 것이다. 중국의 이웃이면서 차이나타운 하나 없는 나라다. 사정이 비슷한 일본에는 60만명 넘는 한국인과 아이누.오키나와 같은 소수민족이 있다. 러시아로부터 북방영토를 돌려받으면 많은 러시아인들이 또다른 소수민족으로 편입된다.

체첸.보스니아.코소보.동티모르에서 서로 다른 민족끼리 유혈참극을 벌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한국이 단일민족국가인 것을 축복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단일민족국가는 축복이 아니라 다른 인종들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박탈한 불행의 씨앗이다.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가 발표한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 인권백서에는 동남아시아의 우리보다 약간 못사는 나라에서 온 근로자들이 한국에서 노예같이 착취당하고 인격적으로 짓밟히는 참으로 부끄러운 실상을 소상히 전한다.

산업기술 연수생이라는 것은 기술을 배운다는 명분으로 2년에서 3년 기한으로 한국의 중소기업에 취업해 한국인들이 꺼리는 3D업종의 일을 하는 동남아시아의 젊은 근로자들을 말한다.

하루평균 12시간 일하고 한달에 36만원 정도 받는 그들의 품삯은 노동력의 착취에 가깝다. 필리핀에서 온 단테 프리스코프(35).한달 품삯 34만원. 첫 3개월은 20%가 적은 27만2천원. 강제로 들어야 하는 은행적립금 15만원을 빼면 실제로 받는 돈은 15만2천원.

단테는 한국에 오는데 3천달러의 교제비를 썼다. 그래서 임금이 한푼이라도 많은 다른 중소기업으로부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계약기간 안에 일자리를 옮기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

외국의 산업연수생을 초청해 중소기업에 배정하는 독점권을 가진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중기협)는 연수생을 보내는 나라의 인력송출회사와 한국에서 연수생들의 '뒷바라지' 를 하는 관리회사까지 선정한다. 거기서 연수생의 선발.파견.관리의 이권을 따려는 동남아나 중국 회사들이 중기협의 담당자들을 상대로 로비활동을 할 틈이 생기고 그런 로비의 부담은 연수생들의 몫이다.

중소기업에 기술연수생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많은 중소기업들은 연수생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여권을 빼앗아 보관하고, 기숙사밖 외출을 통제한다. 밤에는 아예 기숙사의 방문을 밖에서 잠그는 회사도 있다.

연수생들은 한국인 상사와 동료한테 구타당하고 폭언을 듣는다. 여성근로자들은 성희롱과 성폭행의 대상이다.

성폭행으로 임신한 필리핀 여성은 임신했다고 추방됐다. 네팔 출신 근로자들이 5년 전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때리지 말라' 는 구호를 들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했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작업 중 손가락이 잘리고 목숨을 잃는 산업재해를 당해도 보상은 부끄러운 수준이다. 관리회사가 산재보상금을 가로채기도 한다.

한국에서 일하는 20만명의 외국인 근로자 23.2%가 기술연수생이다. 그들이 연수후 한국을 저주하며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의 나라에서 어글리 코리안들은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가.

키신저가 한국의 외무장관이라도 동남아에서 한국의 오명(汚名)을 씻지 못할 것이다.

더 늦기전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기술연수생제도를 폐지하고 관련법들을 정비해 모든 외국인 근로자를 정규 근로자로 대우하라. 외국인 근로자의 선발.배정.감독권을 중기협에서 노동.산업자원.외교통상부의 공동기구로 이관하라.

60년대 한국의 많은 광원과 간호사들이 서독에 취업했지만 노예같이 착취당하거나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그들은 거기서 밝은 미래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졸부근성과 민족적 단일성의 신화를 집어던지고 남들과 더불어 사는 자세를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글로벌시대 지구촌의 왕따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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