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재벌개혁 윽박지른다고 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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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재벌은 대립관계여야만 하는가. 재벌개혁의 성공이 재벌의 패배가 되고 정부의 승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논리적으로 성립되지도 않고, 또 답변도 뻔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왜곡된 현실이다.

어느 개혁이든지 개혁의 목표는 개혁 대상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의 성패는 개혁 대상의 행동이 얼마나 변화했고 그 변화가 얼마나 항구적인가에 달려 있다. 재벌개혁도 마찬가지다.

지금 정부가 재벌개혁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은 물론 재벌기업들의 행태가 과거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재벌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이 걸리니 좀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이같이 변화해야 한다는 점에는 양측이 모두 공감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양측이 서로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신이 크기 때문이다. 재벌은 정부가 개혁을 강요하는 진의를 의심하고 있고, 정부는 재벌의 느린 변화를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부는 재벌들이 과거에 그랬듯 정권은 유한하지만 재벌은 영원하다는 생각에 임기 후반 정부가 힘 빠지기만을 기다리면서 버티고 있다고 생각한다.

재벌은 지금 정부가 국민의 반재벌 정서를 의식해 재벌 때리기를 반복함으로써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양측 모두 그 불신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정부와 재벌간 긴장관계의 근본적 배경은 서로 지금 한 쪽이 다른 쪽에 밀리면 끝장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개혁이라는 경제문제가 정권의 권위가 걸린 정치문제화한 것이 문제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재벌은 정치세력이 아니다. 재벌은 돈벌이에 관심을 가진 하나의 경제단위일 뿐이다.그렇다면 재벌을 다루는 방법은 역시 정치논리가 아니라 경제원리여야 한다. 정부의 정책을 따르고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접근 방법이다.

따라서 문제해결을 위한 첫 단추는 재벌개혁을 탈정치화하고 경제정책문제로만 보는 것이다. 지금처럼 정부가 여론몰이와 공권력을 통해 재벌을 일방적으로 윽박지르는 방식으론 한계가 있다. 재벌이 정부의 말을 믿고 따르도록 하려면 정부부터 변해야 한다. 정부가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해 햇빛을 비추기로 한 그 원리는 재벌개혁에도 적용돼야 한다.

상대가 자기를 적대시하고 청산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 말을 따르겠는가? 자기를 해칠 것 같은 사람에게 협조할 바보는 없다. 재벌개혁이 성공하려면 이제라도 정부와 재계사이에 신뢰가 회복돼야 한다.

재벌이 변하는 것이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고 그들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재벌 때리기가 정치적 고려나 다른 사심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부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지금 우리가 추진하는 재벌개혁은 단기적으로는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이고 장기적으론 우리 경제와 국가의 장래가 걸린 문제다. 이것을 감정대립이나 기세대결, 정치적 해결방식으로 추진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국민정서에 영합하는 인기주의는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

같은 일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일과 마지못해 하는 일은 그 결과가 크게 다른 법이다. 지금처럼 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을 동원해 압력을 가하면 아마 마지못해 따르는 척은 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정부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날 재벌들은 다시 과거의 나쁜 버릇으로 되돌아갈지 모른다. 따라서 재벌개혁은 오직 재벌들이 협조하고 스스로 변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정부부터 이런 여건을 조성해줘야 한다.

재벌도 지금 그들을 압박하고 있는 실체는 정부나 국민정서가 아니라 국제금융시장과 이를 지배하고 있는 시장원리임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도태하고 말 것이다. 재벌은 유한하지만 시장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김종석 <홍익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