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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 "9족을 죽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가문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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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사극에서는 역사를 찾지 말라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비담 역시 드라마 속 캐릭터와는 다른 인물이다. 우선 “9족(族)을 죽였다”는 점을 보아 비담의 가문은 상당한 지위와 규모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선덕여왕이 상대등으로 임명했다는 기록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대등이면 귀족으로 임명될 수 있는 최고의 자리 중 하나다. 신라사회의 특성상 그런 자리에는 가문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무리가 없는 인물이 임명되었다. 드라마 속 비담처럼 파란만장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 임명될 자리가 아닌 것이다. 비담이 드라마에서처럼 십 수 년의 짧은 시간에 이처럼 대단한 가문을 이룰 재주는 없다.

더욱이 ‘비담의 반란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고 한다. 이들 30명이 병졸이었다면 기록에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들 역시 당연히 신라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만한 고위 귀족이었을 것이다. 그런 귀족들과 이 정도로 인맥이 얽혀 있으려면 근본도 모르는 시절을 보내다 벼락출세한 인물이었을 리는 없다.

또 하나, 선덕여왕으로부터 상대등 자리에 임명됐음에도 “여자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킨 점으로 보아 비담은 왕권보다 귀족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진평왕도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힘없는 꼭두각시 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꼭두각시로 평생을 지낸 왕이라고 보기에는 왕위를 지킨 기간이 너무 길다. 일단 재위 기간만 54년에 달한다. 이 정도 시간 동안 권력의 구심점인 왕좌를 지켰다면 처음에 없던 힘도 생기게 된다.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왕이 그렇게 오랫동안 왕위를 지키는 일은 별로 없다.

또 당시의 국제정세도 드라마가 보여주는 양상과는 많이 다르다. 진평왕 24년 이후로는 고구려·백제와 전쟁이 상당히 잦아진다. 드라마에는 덕만공주가 아직 자신이 공주임을 몰랐던 시절 백제와 전쟁이 한 번 일어난 것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 귀족들은 평화로운 시기에 국내에서 권력투쟁이나 벌이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당시 실제 국제정세에서는 그렇게 한가한 시기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또 한 가지의 편견이 작용한다. 교과서 등에 진흥왕대의 신라가 팽창하면서 백제가 형편없이 위축되었던 것처럼 그려놓는 바람에 당시의 백제가 신라보다 약하거나 기껏해야 신라와 비슷한 세력을 가진 나라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흥왕 이후 진평왕을 거쳐 선덕·진덕여왕 때까지도 신라는 주변 국가로부터 심하게 압박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심하게 신라를 압박했던 나라가 백제였다. 백제의 압박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면 김춘추가 고구려·왜·당을 돌며 결사적인 외교를 벌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외교 덕분에 거꾸로 자신을 압박하던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차라리 이는 강력했던 신라의 팽창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화위복(轉禍爲福)·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드라마에 나타나는 상황은 인물의 성격 개조와 사실에 대한 왜곡, 심지어 있을 수도 없는 일까지 창작해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무리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면 결말이 허무해진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미실이다. 미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지 못할 짓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인물이 갑자기 자신의 기득권보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해버린다는 결말은 허탈감마저 들게 한다. 사실 그럴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실이라는 인물이 인기를 끌자 ‘미워할 수 없는 악역’으로 만들려고 이런 식의 결말을 택한 것 같다.

온갖 갈등을 다 만들어놓고 갑작스럽게 인간적 결말을 맺는 것도 막장 드라마의 전형으로 지목되는 요소다. 그렇다고 사극을 역사 왜곡의 원흉이라고 성토하려는 뜻은 없다. 드라마나 영화·소설 등은 이른바 ‘픽션(fiction)’이라는 전제를 깔고 만들어진다. 글자 그대로 ‘허구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 허구를 만들어내는 일을 공인받은 사람들에게 사실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면박을 주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 같다. 단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니 재미있게 웃고 즐기는 선에서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그럴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거기서 ‘역사’를 찾지 않기만 하면 역사왜곡이라는 위험성은 줄어들 테니까.

다행스럽게 사극을 역사 자체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많은 시청자가 심지어 미실을 살려 두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만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그런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의 퇴장으로 인기가 반감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끝난다면 시청자들로서는 섭섭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드라마의 제목은 <선덕여왕>이다. 제목에서부터 선덕여왕이 주인공이라고 되어 있다. 미실에 묻혀 그 의미가 얼마간 퇴색하기는 했지만, 명색이 주인공이니 이제부터 그의 활약이 전면으로 부각될 여지는 충분히 있다. 그러니 역사 속에서 선덕여왕의 역할도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다스리던 기간에 일어난 일의 대부분은 고구려나 백제와 공방전에서 선방했다는 것, 백성을 잘 보살피고 당과 관계를 잘 다져 나갔다는 것 등이다. 636년 백제의 공격을 미리 예측해 500명이나 되는 백제군을 섬멸했다는 사건 같은 예지력을 제외하고는 선덕여왕의 개인적 능력이 특별히 발휘되었던 일은 없다.

세상에 알려진 이름값만큼의 업적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선덕여왕이 위대한 지도자로 알려진 데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라는 프리미엄이 작용한 것 같다. 하기는 여왕의 등장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전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여왕이 등장해 활약했던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좋은 드라마적 요소다. 그러나 현실의 신라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선덕여왕이 즉위할 무렵은 3국 간에 험악한 정복전쟁이 빈번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여성이 왕이 된다는 것 자체가 나라에는 큰 충격이다. 더욱이 왕위 계승의 원칙이 깨질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집권하게 된 셈이었다.

신라로서는 위기를 맞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시기를 무난히 넘기며 통일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기반을 다졌다는 것 자체가 공이라면 공이 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선덕여왕의 공덕일 수 있다. 위기를 그렇게 무난하게 넘기지 못했다면 진골로서 최초의 왕이 된 김춘추는 크게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이는 신라의 통일에도 악영향을 주게 된다.

신라가 통일을 이루게 된 직접적 원인은 대제국이었던 당(唐)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현 시점에서 일반의 시각으로 보면 외세를 끌어들인 셈이다. 선덕여왕 때 신라가 국내의 안정을 이루지 못했으면 통일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 이희진 역사학자, 전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자료연구책임자 [dk71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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