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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난 책임, 불낸 책임, 불 끄는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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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지난 한 해에만 4만9000여 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그중 부주의로 인한 화재가 48.5%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절반의 화재를 줄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소방방재청은 면적 등 일차원적인 소방시설 기준을 화재위험도에 따른 기준으로 현실화하는 제도개선을 검토 중이다. 그러면서 ‘예방 활동’ 차원에서의 소방의 역할에 대해 다시 고민하고 있다. 소방검사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 검사를 한 곳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옳은 것일까. 오히려 관 주도의 소방검사가 소방시설을 갖추고 화재 예방을 해야 할 주체들에게 ‘검사만 통과하면 그만’이라는 잘못된 인식과 관행을 준 것은 아닐까.

초기 진화에 가장 효과가 높은 것으로 증명된 스프링클러를 포함한 소방시설 설치비가 전체 건축비의 1.62%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내 재산과 내 가족의 안전이 달려 있는 스프링클러 설치를 회피하기 위해 기준설정에 반대하고, 심지어는 부실한 설비를 해 놓고 검사를 통과하기 위해 반칙을 시도하기도 한다.

화재를 예방할 책임과 함께 불이 나면 피해당사자가 되는 소유주, 업소 주인들이 필수적인 소화장비, 대피통로 확보 등을 건축단계부터 지켜 나가도록 할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되면 따로 관에서 주민과 다퉈야 할 일도 없고 화재 예방이 실질적으로 이뤄질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꿈이나 이상이 아니다.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당연한 일이다.

그 변화는 화재 발생에 대한 책임은 불을 낸 사람에게 묻고, 소방은 불을 못 끈 책임을 지도록 하는 관념의 전환으로부터 가능해진다. 국민이 자발적으로 화재예방 노력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선진국처럼 화재보험을 보편화하고 보험사에서 검사와 점검을 통해 화재보험료를 부과하면 건축주나 영업주는 스스로 화재에 안전한 시설과 설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운전자책임보험처럼 선량한 피해자 보호를 위한 화재책임보험 도입도 필요하다.

주거를 마련하는 기준도 화재 안전에 최우선을 두도록 유도해야 한다. 아파트 등 집을 사거나 임대를 할 때 소방안전시설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곳은 피하고, 잘 돼 있는 곳은 비싼 대금을 지불하더라도 들어가고 싶어 하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관 주도의 단속만으로는 비상구 잠금 행위나 물건적치 행위 등을 적발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도 문제다. 대부분 지하층의 다중접객업소는 건축허가를 받을 때 주 출입구와 비상계단 등 비상구를 확보하도록 하고 있으나, 점검을 받은 뒤 비상구를 보관물품들로 막아두거나 잠가두는 경우가 흔하다. 국민의 보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불법행위 신고를 이끌어 내기 위해 ‘비상구 불법행위 신고포상제(일명 비파라치제)’ 도입을 추진하는 이유다.

화재를 줄이기 위해선 정부·시설관리자·이용자 삼자의 각성과 공동 노력이 절실하다. 불난 책임, 불낸 책임, 불 끄는 책임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게 그 시작이다.

박연수 소방방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