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천만 공룡 수도권] 과밀에 멍든 서울 구로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장기적인 도시계획 부재에 따른 마구잡이 개발의 그림자는 수도권 곳곳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지난달 1일 부터 이달 7일 까지 7차례에 걸쳐 연재된 '2천만 공룡수도권' 에 이어 각 지역의 명암과 애환 등을 소개하는 '속(續) 2천만 공룡수도권' 시리즈를 주1회 싣는다.

"창문 여는 건 아예 포기했어요. 햇빛 구경은 엄두도 못냅니다."

서울 구로구 구로시장 뒤편 다세대주택 3층에 사는 최민주(32.여.구로4동)씨 집은 낮에도 항상 형광등을 켜야한다.

이웃 집까지 50㎝도 안돼 거실쪽은 햇빛이 거의 안들어와 어두컴컴하기 때문이다.

崔씨집 거실에서 창문을 열고 손을 뻗으면 건넛집 창문틀이 손에 잡히고 안방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지난해 여름 더위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창문을 열어놓았지만 옆집 사람들 눈을 의식해 소매 없는 옷은 입지도 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촘촘히 들어선 건물들이 바람을 막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1970~80년대 구로공단 근로자들의 집단거주지였던 '벌집' 으로 유명했던 구로 3.4동 일대가 또다시 현대판 '벌집촌' 으로 개발돼 신음하고 있다.

건축법상 주택건립 요건을 대폭 완화해 89년부터 시작된 '주거환경개선사업' 이후 겉모습은 번듯하게 지상 4층 규모의 다세대주택가로 변모했다.

그러나 정작 채광.통풍.주차 등 '삶의 질' 내용은 하나도 향상되지 않았다고 주민들은 하소연한다.

구로4동 739번지 일대는 30㎝~1m 간격을 두고 다세대주택이 4백90개동, 3천여 가구가 밀집해있다.

부근 구로3동에도 2백60개동이 몰려있는 등 구로구에만 이런 지역이 7곳에 이른다.

80년대 후반 당국은 '벌집' 세입자 등에게 좀더 넓은 주거공간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대규모 재개발을 허용했으나 건설업자들은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이에 따라 주민들 스스로 주택개량을 할 수 있도록 높이 제한을 해제하고 주차장 시설을 면제하는 등 특혜성 '주거환경개선사업' 을 89년 도입한 것. 하지만 이 사업은 과밀 주거지역을 확대 재생산하는 부작용을 야기, 오히려 주거환경을 악화시킨 결과만 가져왔다.

이 가운데 일조권 문제는 이미 만성이 됐지만 주차난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이 지역 최대의 두통거리. '70년대에는 20여 가구꼴로 화장실 한 곳을 사용하면서 매일 화장실 전쟁을 벌인데 비해 지금은 주차 전쟁이 한창이다.

주민 장인홍(張寅洪.34)씨는 "폭 4m가 채 안되는 골목에서 주차문제로 이웃간 다툼이 벌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고 말했다.

좁은 도로와 빽빽이 들어선 집들은 화재에도 무방비 상태다.

정연주(34.여)씨는 "집에 불이 나더라도 소방차가 들어올 수가 없다" 며 "이 때문에 화재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 " 이라고 머리를 흔들었다.

鄭씨는 전세 계약기간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주민들의 불만이 잇따르자 서울시는 뒤늦게 오는 7월부터 주거환경개선지구에 대해서 건물 신축은 장려하되 일반 건축물 절반 수준의 규제를 가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주변 인프라가 열악한 상태에서 노후주택을 헐고 집을 늘려 짓는 방식은 이 지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대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 권영덕(權寧德)연구원은 "외국의 주택 개량사업은 인프라가 충분히 마련돼 있는 지역의 노후 건물을 대상으로 한다" 며 "공공시설 확충 없는 개량사업은 과밀화의 악순환만 초래한다" 고 진단했다.

구로시민센터의 최왕곤 대표도 "주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한다는 당초 취지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건설업자와 임대업자들의 배만 불려주었다. 녹지 공간 확보 등을 통한 생활여건 개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고 지적했다.

김영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