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밥값 내느니 이민 가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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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뉴질랜드 이민을 결정했습니다. "

지난달 중순 총선 출마 의사를 접은 A씨가 기자에게 던진 말이었다. 총선운동 3개월 동안 겪은 경험으로 이 나라에 살기가 싫어져 그렇게 결정했다고 털어놨다.

A씨가 총선에 뛰어든 것은 지난해 12월.

모 정당 공천에서 탈락한 후 무소속 출마를 결심했다. 출마를 선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곳곳에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다.

"좋은 모임이 있으니 얼굴을 비춰라" "주부들이 40여명 모여 있으니 참석하라" 는 등 모임을 알리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조직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수많은 모임을 열심히 찾아 나섰다.

단지 한 표라도 더 확보하려는 급한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모임에 참석해 인사를 마치자마자 그가 들은 말은 고작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 전부였다. 황당한 생각이 들었지만 계산은 꼬박꼬박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계산을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어김없이 계산서가 사무실로 배달됐다. 30만~40만원 정도로 생각했던 식대는 1백만원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번은 계산을 거부했더니 "돈도 없으면서 출마는 왜 했느냐" 는 협박성 전화까지 빗발쳤다고 했다. A씨는 결국 그 식대마저도 지불했다고 말했다.

그가 3개월 동안 사용한 돈은 퇴직금을 포함해 9천만원에 이르렀다.

그는 조직을 갖춘 총선출마 후보들이 선거철에 수십억원을 퍼붓는다는 '풍문' 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평생 공무원으로서 모신 '국민' 은 누구고 의원으로서 모셔야 할 '국민' 은 누구인지가 헷갈려 이민이라는 마음 아프지만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고 씁쓸하게 말했다.

이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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