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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타는 일본 정국] 오부치 내각 20개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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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헤집고 들어가도 들어가도 청산' - .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그가 좋아하는 시구처럼 재임기간 내내 일에 파묻혔다.

총리의 중책이 '범인(凡人), 오부치' 의 머리를 짓눌렀던 때문일까. 그는 짧은 기간 많은 일을 이루고 그만큼이나 비극적으로 퇴장한 셈이다. 오부치는 재임 중 '일본발 세계공황' 우려를 불러일으켰던 금융불안을 잠재웠다.

1998년 60조엔의 공적자금을 쏟아붓는 총력전을 폈다. 경제회생의 가닥도 잡았다. 99년도의 성장률도 플러스로 나타날 게 확실하다.

국내정치도 크게 바뀌었다. 보수 본류인 자유당과 손을 잡은 데 이어 공명당까지 끌어들여 정권을 반석에 올려놓았다. '보수대연합' 은 전후 안보.치안 분야의 숙제들을 해결하는 밑바탕이 됐다.

주변국에 분쟁이 벌어질 때 자위대가 발을 들여놓도록 한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관련법도 통과됐다. 일본이 미.일동맹의 실질적인 한 축을 맡는 것은 자민당 일당 지배 때도 손을 대지 못했던 일이다.

조직폭력배를 단속하기 위한 통신감청법과 일장기.기미가요(君が代)를 국기.국가로 정하는 법, 헌법조사회 설치법도 성립시켰다. 모두 금기시돼 온 것들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전 총리가 내건 '전후 정치의 총결산' ,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자유당 당수의 '보통국가 일본' 을 하나로 뭉뚱그려 단기간에 '일본 개조' 를 달성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중국의 과거사 공세로 생겨난 우경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외교에서도 오부치는 일본의 위상을 높였다. 한국과는 과거사를 매듭지었고 미국과는 동맹을 강화했다. 한국과의 21세기 동반자 관계 구축, 적극적인 접근과 인맥 형성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북 정책은 대화와 억지를 통해 발언권을 확보했다. 5일 시작되는 북.일 수교협상은 한.미 양국의 대북 정책에 발을 맞춘 노선전환이었다.

오부치는 최근 경찰의 잇따른 불상사, 금융재생위원장의 업계 봐주기 발언으로 궁지에 몰렸다. 한때 60%를 넘보던 내각 지지율은 30%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재임 중 이룬 전반적인 실적은 '1급 총리' 로 평가받을 만하다.

무엇보다 효고(兵庫)현 남부 대지진, 옴진리교 테러, 관료 부패, 도산, 실업으로 황폐해진 일본사회에 낙관주의를 심으려 애쓴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고난과 차별의 섬 오키나와(沖繩)를 주요국(G8)정상회담 장소로 정한 것은 오부치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아량의 산물이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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