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 고발만이 능사는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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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달 27일부터 각 후보들이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이와 관련, 중앙일보를 포함한 거의 모든 언론들은 전국이 정치인들의 피나는 격돌의 장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 3월 30일자에서는 후보자들의 납세.병역.전과기록이 이번 선거에서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예견했다.

그런데 이같은 보도에도 불구하고 과연 얼마나 많은 유권자들이 이러한 후보들간 격돌을 현명한 판단을 위해 의미있는 일로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데는 의문이 생긴다. 오히려 선거기간 중의 언론보도가 선거 이후 사람들의 인식속에 부정적인 그림을 남기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언론이 갖는 위력 중의 하나가 바로 현실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언론에 한번 보도되기만 하면 그것은 이미 사실이 된다. 적어도 우리의 인식과정은 그렇게 진행된다.

하지만 기정사실화한 현실에 대한 기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어렴풋이 그것이 무엇이었나 또는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는 흐린 인상만 남게 된다. 즉 사건의 본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사라지고 기정사실로 전환된 전체적인 형상만이 희미하게 남게 된다. 이러한 점은 총선보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식 선거운동기간에 들어가기 전 선거보도의 화두는 '지역감정' 문제였다. 지역감정을 조장할 수도 있는 선거보도를 자제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지역감정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중앙일보는 3월 13일자 사설에서 보도의 자제가 능사만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보도의 자제가 오히려 확실치 않은 음해성 유언비어로 나타나 선거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최근 며칠새 언론은 들춰내기 식 지역감정 보도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언론의 신중한 대처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론에서 고발하려는 지역감정의 경각심과 본질적인 문제점은 시간이 지나면 유권자들의 기억 속에서 대개 사라지고, 지역감정의 존재사실만이 메워질 수 없는 골처럼 선거 이후에도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된 이후의 주제는 '시민의식의 실종' 과 '후보 검증' 이다. 우리 언론들은 선거보도를 하면서 유권자들의 백태를 거의 빠뜨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도는 시민정신이 실종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소수임에도 마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판에 휩쓸려 정신을 못차리거나 정치 후보자들에게 기생하는 것처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또 후보자 검증과 관련해선 후보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보다 국민의 알 권리와 현명한 선택에 도움을 주기 위한 방향에 치중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후보자들의 자질 문제를 납세와 병역의무를 제대로 행하였는가, 그리고 전과는 없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하게끔 하는 정부의 의도를 언론보도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검증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해도 언론은 이러한 기록의 공개가 어떠한 의미인지를 또는 대안은 없는지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후보자들을 개별적인 검증없이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어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사실을 언론이 비판적으로 보도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것은 언론의 역할에 부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언론이 고발 자체에 지나치게 집착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고발에만 집착하게 되면 그 고발의식에 일치하는 시각으로 기사 내용을 이끌어 가게 되며, 궁극적으론 공정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현실을 잘못 전달할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슈들에 대한 궁극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고 뉴스거리들만 보도하는 것은 기정사실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언론이 의도하는 바와 정반대의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보도로 선거가 끝난 후에 유권자들의 기억에서 본질적인 것은 사라진 채 선거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만 남겨 정치를 혐오하는 현상을 낳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재진<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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