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새 사외이사들 쓴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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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솔직히 최고경영자와의 친분 때문에 사외이사가 됐어요. 그렇다고 경영감시 활동을 등한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A교수)

"공직에 근무한 경험 때문에 회사가 '엉뚱한' 부탁을 하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관료 출신 B씨)

"신임 사외이사를 위한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조차 없어요. 기업 내용도 잘 모른 채 사외이사를 하고 있는 셈이죠. " (기업인 C씨)

올해 새로 선임된 대기업 사외이사들은 제도가 도입된 지 3년이 지났지만 회사안에 경영진과 사외이사를 연결하는 상설조직조차 없는 등 고쳐야 할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대주주의 전횡을 막고 소액주주를 보호한다는 원래 취지와 달리 이번 주총에서도 대기업 오너.경영진과 친분이 있는 인사들이 상당수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모 기업 관계자는 "일부 대기업들이 규정보다 1년 앞당겨 이사회 정원의 절반을 사외이사로 채웠지만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할지는 의문" 이라고 말했다.

◇ 회사를 잘 모르는 사외이사가 많다〓I사 사외이사로 선임된 모 교수는 "일단 열심히 출석하겠다" 고 말했다.

전공이 회사 업종과 다르다는 그는 "선임된 지 1주일이 지났는데 아무도 기업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사업장도 보여주지 않았다" 고 말했다.

관료 출신인 모 공인회계사는 "이사회에 참석하다 보면 회사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고 말했다.

인천제철의 경우 채권단이 대주주로 은행이 추천한 경우가 많아 철강회사임에도 7명의 신임 사외이사 중 금융권 출신이 5명이다.

데이콤의 사외이사인 박상용 교수(연세대)는 "회사내에 이사회와 관련된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면서 "경영현황을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고 회사측에 요구했다" 고 말했다.

그는 "사외이사가 몇명이냐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대주주의 전횡을 감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고 말했다.

◇ 상당수 연고(緣故)로 뽑혔다〓교수.변호사.전직관료들의 경우 지명도나 경영진과의 친분에 따라 뽑힌 경우가 많았다.

H해운사 사외이사인 Y변호사는 "최고경영자와 인연이 있는데다 오랫동안 이 회사 법률자문에 응해왔다" 면서 "사외이사 추천 이야기가 있길래 지난해 말 법률자문 계약을 해지했다" 고 말했다.

모 대학교수는 "고교동창인 최고경영자의 권유로 맡았다" 고 밝혔다.

주거래은행 임원 출신을 영입한 H사 관계자는 "사외이사에게 회사의 주요 기밀사항까지 알려줘야 하는 마당에 평소 친분이 없는 사람을 뽑을 수는 없지 않으냐" 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사외이사인 박진원 변호사는 "대주주가 잘 아는 사람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것은 선진국도 비슷하다" 면서 "제일은행의 경우처럼 경영진 책임을 묻는 소액주주들의 소송이 많아지면 아무리 연고에 의해 선임된 사외이사라도 절대 업무를 태만히 할 수 없다" 고 말했다.

◇ 교수와 변호사.전직 관료 순으로 많다〓대기업 주요 계열사 신임 사외이사 85명 중 기업 대표.임원 등 전.현직 기업인이 2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일부 대기업들은 글로벌기업의 전문경영인이나 외국인을 영입했다.

LG화학은 전국환 전 한국3M부사장을, LG전자는 이재형 앤더슨컨설팅 대표를, LG정보통신은 신재철 한국IBM사장을, 현대전자는 손영권 미국 오크테크놀로지 사장을 각각 영입했다.

삼성전자는 이와사키 데쓰오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 재팬 회장을, 쌍용정공은 구사카 다카오 구사카엔지니어링 대표를, 현대자동차는 다카시 미쓰비시상사 이사를 각각 선임했다.

교수(23명)가 가장 많고 변호사와 전직관료가 각 9명씩, 은행 임원 출신 8명이 사외이사로 뽑혔다.

김동섭.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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