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커버스토리] 현대 정주영, 후계 안개속… 집들이 안팎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현대그룹의 후계 분할을 둘러싼 내홍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은 23일 오전 11시20분 동생.아들.조카 등 일가 40여명을 새로 이사한 가회동 자택으로 불러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그러나 이날 鄭명예회장은 후계구도 등과 관련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현대그룹 관계자가 전했다.

또 지난 4일 출국해 해외에 장기 체류 중인 정몽헌 회장은 23일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 정몽구 회장 요구로 서둘러 모여〓이날 집들이를 겸한 친족 모임은 정몽구 현대회장이 서둘러 주선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 관계자는 "정몽구 회장이 22일 저녁 명예회장에게 우리 풍습대로 내일 집들이를 하자고 말씀드렸다" 며 "명예회장께서 바쁜 사람은 오지 말고 점심이나 하자고 하셨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룹측은 "鄭명예회장이 가족끼리 점심이나 하자" 고 제안해 이뤄진 것이라고 발표했다.

몸이 불편한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이 미니밴을 타고 참석한 것을 비롯,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정상영 KCC 회장 등 鄭명예회장 형제와 '몽(夢)' 자 항렬 자녀 7남1녀 중 해외 출장 중인 정몽헌 현대회장과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을 뺀 나머지 대부분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했다.

미국에서 암 치료 중인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가족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鄭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도 입원 중이라서 자리를 함께 하지 못했다.

전문경영인들은 이날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김재수 구조조정위원장과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이 오전 10시40분쯤 들렀다가 행사가 시작되는 11시쯤 나왔다.

◇ 무거운 분위기의 친족들〓鄭명예회장이 부부 동반으로 대식구를 소집한 것은 생일 잔치 외에는 전례가 드문 일이어서 대문을 들어서는 가족들은 정몽구 회장을 제외하곤 대부분 굳은 표정이었다.

특히 인사 파문의 한 축인 정몽헌 회장이 해외에 나가 있는 데다 鄭명예회장이 이날 후계구도와 관련해 중대 발표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 정몽구 회장은 오전 10시55분 미소를 띠우며 승용차 창문을 반쯤 열고 대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점심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급히 빠져 나갔다.

한 참석자는 "여느 집들이와 같았다" 며 "명예회장은 인사파문이나 정몽헌 회장과 관련해 언급하지 않았다" 고 말했다.

◇ 점심 들면서 주로 가족과 집얘기〓이날 자리배치는 鄭명예회장과 형제들이 라운드 테이블에 앉았고, 명예회장의 아들 형제와 조카들이 11자 형태의 자리에 나이순으로 앉아 한식을 들었다.

참석자들은 ▶최근 건축자재 시장의 변화▶골프치다가 허리를 다친 것▶중앙병원 내과의사가 치료를 잘 한다는 얘기 등 '일상사' 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한 참석자는 "명예회장 자리에서 정몽구 회장을 바로 쳐다보기 어려운 배치였다" 며 "명예회장은 주로 형제들과 대화를 나눴으며 아들 형제 중 누구를 지목하거나 부른 적은 없었다" 고 말했다.

그는 "명예회장이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대화해 멀리 앉은 아들이나 조카들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고 전했다.

식사를 마친 가족들은 새 집을 둘러본 뒤 낮 12시30분쯤 집을 나섰으며 기념촬영은 없었다.

현대그룹 고위 관계자는 "갑작스런 집들이 가족모임은 인사파문에 따른 그룹내 분란을 잠재우기 위한 것" 이라며 "명예회장이 이날 특별한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은 이심전심으로 뜻을 알았을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명예회장은 자신이 큰아들로서 동생들을 돌보고 보살폈기 때문에 장자(長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며 "청운동 자택을 큰아들격인 정몽구 회장에게 물려준 것을 후계구도에 대한 명예회장의 '결심' 으로 봐도 된다" 고 말했다.

그는 또 "현대증권 인사가 번복될 가능성은 없다" 며 "정몽헌 회장의 귀국이 늦춰지는 것도 '왕회장' 의 뜻을 간파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김시래.김동섭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