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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삶과 예술을 말하던 음악애호가들 다 어디 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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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음악애호가들은 요즘 ‘빨간 박스’ 등장에 잠시 들떴다. ‘클래식의 종가(宗家)’ 도이치 그라모폰(DG) 111주년 기념음반(CD 55장) 박스가 빨간 색깔이기 때문인데, 5~6세트를 구입해 선물하는 이도 봤다. 사실 한 세트에 10만원대인데다가 내용도 실하니 입이 쩍 벌어질 판이다. 지휘자 아바도·번스타인, 피아노의 아르헤리치 등 간판스타들의 명레코딩으로 빼곡한 이것 하나로 음악라이브러리를 꾸며도 손색없다. 하지만 마음 개운치 않다. 천하의 DG가 반짝 매출용 ‘떨이상품’에 앞장선 대목부터 좀 걸린다.

LP시대를 한때 기세 좋게 밀어냈던 CD가 그만큼 볼썽사납게 등 떠밀려 퇴장 중이다. 세계 음반시장은 인터넷·모바일 다운로드 시장에 밀려 쑥대밭이다. 또 다른 명문(名門) 영국 EMI도 부도위기라지 않던가. 경영미숙이 겹쳤다지만 결국 음악환경 격변 탓이다. 메이저 음반사들이 떨이상품 같은 ‘투매(投賣) 마케팅’ 유혹에 빠져들수록 시장은 빠르게 황폐화된다. 아티스트 발굴과 안정적 음반 공급부터 불가능한데, 남의 다리 긁을 때가 아니다. ‘IT 강국’ 한국의 음악시장부터 걱정이다. 음악광들의 사랑방 음반가게가 위태위태하다. 국내 하나밖에 없던 재즈전문점 ‘애프터아워즈’가 우선 그렇다.

이 공간은 최근 한 오피스텔로 옮겨갔다. 건물 17층 꼭대기를 물어 물어 찾아가니 20평 빠듯한 공간은 음반 창고에 가까웠다. 임대료 압박에 넓은 매장 유지가 불가능했고, 차제에 생존을 선택했다는 소리에 마음 짠했다. 뿐인가? 국내 하나인 클래식전문 ‘풍월당’도 매장을 줄였다. 한 켠에서 음료수를 파는 등 수익사업을 겸하는데 전과 또 달라진 풍경이다. 이들 두 곳은 신나라·핫트랙스(교보문고 광화문점)와 함께 음악환경의 핵심인데, 더 살벌한 건 지방 소식이다. ‘구색을 좀 갖춘’ 음반매장은 2~3년 새 전멸했다.

그래도 선전 중인 교보문고 핫트렉스의 부산·대구점을 꼽을 경우 애호가들이 드나들만한 매장은 서울 넷, 지방 둘이 전부다. 그거 엄연한 현실이다. 업종·업태를 막론하고 가장 큰 변화인데, 이 통에 지방 애호가들은 서울의 인터넷서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예스24’는 이미 온·오프 통틀어 음반매출액 1위 업체다. 음악시장 전성기 90년대와 판이하다. 놀라지 마시라. 당시 음반가게가 전국에 2000개 내외였다. 매출액은 4104억 원(1997년)으로, 세계 7~8위라고 거들먹거렸다. 옛말이다. 2007년 매출액은 788억 원, 즉 10년 전의 19%로 쪼그라든 것이 음반시장의 현주소다.

반면 음악다운로드 시장은 4176억원(2008년 『음악산업백서』)으로 몸집을 불렸다. 배(음반)보다 배꼽(음악파일 다운로드)이 커진 기형적 구조다. 한국이 세계 음악시장 변화를 ‘이끄는’ 모양새인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 너무도 황량하게, 아무 축적도 여운도 없이 문화동네 한 곳이 증발해도 될까? 변화를 짚어주는 이도 없으니 한 시대 마감이 더욱 쓸쓸하다. 되물을 건 따로 있다. 일회용 상품을 쓰듯 파일로 다운받아 대충 쓰고 버리는 음악소비가 과연 좋은 변화일까? 진지하게 음악을 들으며 삶과 예술을 말하던, 그 많던 음악애호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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