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정부, "사이버 금융이 생존 좌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디지털에서 뒤처지면 한국 금융산업의 미래는 없다' .

정부와 금융당국이 은행들에 디지털 금융으로의 변신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이헌재(李憲宰)재정경제부장관은 16일 국제금융박람회 행사에 참석, "조만간 사이버금융이 금융산업의 전면에 등장할 것" 이라며 "정보기술(IT)투자는 물론 조직과 사람을 다 바꿔야 한다" 고 말했다.

같은 시간, 금융연구원 세미나에서 이용근(李容根)금융감독위원장은 "디지털 금융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 라며 "은행별로 디지털 금융 계획안을 만들어 발표할 것" 을 주문했다.

두 장관의 이날 발언은 의례적인 수사를 넘어 그간 지지부진했던 은행들의 2차 구조조정에 대한 강한 불만과 경고가 담겼다는 게 금융계의 해석이다.

실제 李장관과 李금감위원장은 "디지털 금융을 적극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될 것" 이라며 사이버공간에서 펼쳐질 세계 금융전쟁에 자신이 없는 경영진은 자리를 떠나달라는 주문도 서슴지 않고 있다.

◇ 정부는 은행에 불만〓산업의 중심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속 이동 중이지만 국내 금융기관들의 디지털화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다는 게 정부의 시각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 "최근 미국.일본의 초대형 은행간 합병은 IT투자의 효율성 등을 극대화해 세계 디지털 금융시장을 지배하기 위한 사전포석" 이라며 "사이버 공간의 특징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예처럼 선점한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는 점" 이라고 말했다.

금융연구원 권재중 연구위원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가려면 단순히 시스템만 깔아선 곤란하고 기존 조직.인력이 모두 바뀌어야 한다" 며 "정부의 디지털 금융 변신요구는 따라서 은행간 합병 등 혁명적인 구조조정 촉구의 다른 표현으로 봐야한다" 고 말했다.

정부는 국내 은행들의 사이버 금융 수준은 인터넷을 통한 단순 대금결제나 대출 등 기존 서비스를 전산망에 그대로 옮겨놓은 '1세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판단이다.

디지털 금융의 진짜 무대라 할 고객 요구에 맞춰 모든 상품을 조합, 처리해주는 원스톱 서비스 등은 시작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보안성 등 소비자 보호장치도 크게 미흡하고, 인터넷 해킹에 대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갖춘 은행도 거의 없다.

탁승호 서울대 컴퓨터 신기술연구소 IC카드연구센터장은 "현재 국내 은행들의 인터넷 뱅킹은 대형 금융사고에 전혀 무방비 상태" 라고 지적했다.

◇ 일본이 뛴다〓한국에 비해 수백조엔의 부실채권으로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했던 일본의 경우 디지털 금융쪽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지난 14일 합병을 선언, 세계 3대은행으로 부상하게 된 산와.도카이.아사히 은행은 매년 1천억엔 이상을 IT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24일 일본채권신용은행을 합병한 소프트뱅크 기타오 상무는 기자회견을 통해 "단순 결제를 인터넷에 옮겨놓는 1세대 사이버금융은 끝났다" 며 "결제업무와 증권투자를 온라인으로 연결하고 사이버 지점을 만들어 디지털 금융의 선두주자로 나서겠다" 고 선언했다.

일본 정부는 다수의 은행.쇼핑몰 등과 함께 일본 인터넷결제추진협의회를 발족, 올 가을부터는 한개의 은행계좌로 회원사간 온라인 쇼핑.결제를 한번에 처리하도록 할 계획이다.

◇ 은행들도 움직인다〓최근 샐러먼 스미스바니 은행이 주최한 '아시안 뱅킹 콘퍼런스' 에 참석했던 위성복(魏聖馥)조흥은행장은 "각국 은행장들이 조만간 뱅크(은행)는 사라지고 뱅킹(은행업무)만이 남는 금융시대가 열린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며 사이버 뱅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내 은행들도 저마다 인터넷 뱅킹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나름대로 투자에 나서고 있다. 다만 개별은행 차원의 투자와 경쟁만 벌이고 있을 뿐 세계적 금융기관들을 의식한 자발적인 합병.제휴 등에는 은행간 이해가 엇갈려 진전이 없는 실정이다.

올들어 인터넷 뱅킹 업무를 시작한 은행은 국민.하나.주택.조흥.신한.외환.한미.한빛.농협 등 모두 9개로, 웹사이트를 통한 대출업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 9개 은행의 인터넷 뱅킹 거래고객은 지난해말 16만2천여명에서 지난달말엔 31만1천여명으로 약 90% 늘었다.

신한은행의 경우 지난 1월말을 고비로 인터넷 대출 건수가 창구 대출 건수를 앞질렀다. 조흥은행을 비롯해 주택.한미은행과 동양종금의 경우는 아예 인터넷 은행을 별도법인으로 설립할 계획이다.

임봉수.이정재.신예리 기자, 도쿄〓남윤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