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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내일 다시 악수하면 그만" -. 4당체제로 뒤바뀐 선거판. "우리가 언제 동지였냐" 는 식의 정치지도자들의 독기(毒氣)오른 변신이 유권자를 헷갈리게 한다.

민국당 조순(趙淳)대표는 지난 12일 1만여명이 모인 부산 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이라는 썩은 당과 이회창이라는 몰인정한 사람이 정권교체를 할 수 있겠느냐" 고 공격했다.

참석자들은 환호했지만 趙대표는 불과 열흘 전만 해도 李총재의 한나라당에서 명예총재를 지냈다. 한나라당이란 이름도 그가 지은 것이다.

같은 당 이수성 상임고문은 13일 대구회견에서 "여권은 집권 후 정치도의와 정도를 완전히 일탈했다" 고 일갈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의장으로 있는 민주평통의 수석부의장이기도 했던 李고문은 민국당에 합류하기 직전 "(金대통령으로부터 민주당 당직과 관련한)과분한 제안을 받았다" 는 말을 하기도 했다.

민국당에 합류하기 전과 후의 그의 발언은 애증(愛憎)이 완전히 갈렸다. 이회창 총재는 13일 이수성 고문이 나오는 칠곡에 들어가 "젊고 정직한 세력과 병들고 물러나야 할 세력의 싸움이다. 옛날 나와 같이 당을 함께 한 적은 있지만 이제는 물러나야 할 세력" 이라고 비난했다.

한국신당을 이끄는 김용환(金龍煥)의원은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를 향해 "JP의 언동은 충청인을 우롱하는 것" 이라고 거칠게 공격했다.

사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다. 오죽했으면 적지 않은 세월을 '동지' 혹은 '우호적' 관계를 맺어 온 상대방을 이다지도 마구 비난했을까 하는 심정을 헤아려 볼 수도 있다.

이회창 총재의 '공천 파동' , 김대중 대통령의 '사람 관리' , 김종필 명예총재의 '2중적 행태' 도 "어제의 동지를 오늘의 적으로 만드는 정치" 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정치지도자들의 과거 모습과 현재 발언 사이에 유권자들이 혼란을 느끼고 있는 점이다. 이들의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행태가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져 정치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모당의 첫 출마자는 14일 "선거현장의 말이 너무 험하다. 정치적으론 싸워도 인간적으론 최소한 지킬 선을 지켜줬으면 교육적으로 좋겠다" 고 말했다. 그래야 혹시 내일 다시 악수하더라도 덜 겸연쩍을게 아닌가.

전영기 기자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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