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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 대만 총통선거…정책·노선 실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대만 대선이 색깔을 잃어버렸다. 양안정책을 놓고 급진과 온건, 합리와 요설(饒舌)을 따지던 목소리는 쑥 들어갔다.

대신 세(勢)대결이 그 자리를 메웠다. 수십만명의 관중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명망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안간힘이다. 노선도 이론도 없다.

서로 물고 물리는 진흙벌 싸움이 있을 뿐이다. 투표일까지 꼬박 나흘을 남겨놓은 대만 대선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 핵심적인 맥을 짚어본다.

◇ "약세 정부, 강세 사회. " 〓홍콩내 대만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한 말이다.

누가 대만 총통에 당선되더라도 대선 후 대만 정부는 약세, 사회는 강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당 롄잔(連戰),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무소속 쑹추위(宋楚瑜)등 비등한 세 후보들의 세불리기 작전 때문이다.

宋후보는 12일 자신의 측근인 류쑹판(劉松藩) 전 입법원장을 시켜 린양강(林洋港) 전 사법원장에게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를 표했다.

하오바이춘 전 행정원장, 위궈화(兪國華) 전 행정원장에게도 사람을 보냈다. 이들 세 사람은 宋이 국민당 내에서 승승장구할 시절, 宋과 정치적으로 날카롭게 대립했던 인물들. 그러나 막판 굳히기를 노리는 宋후보는 기꺼이 이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세 후보가 가장 치열한 '쟁탈전' 을 벌였던 노벨화학상 수상자 리위안저(李遠哲)중앙연구원장은 陳후보 지지로 돌아섰다. 連후보도 전력과 노선을 불문하고 지지세 확보에 승부를 건 모습이다. 후보들의 이같은 '묻지마' 유세는 종교.사회단체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홍콩 대만문제연구소 황원팡(黃文放)소장은 "과거의 강력한 일당체제가 붕괴된데다, 세 후보의 정립(鼎立)으로 사회적 입김이 상대적으로 강해졌기 때문에 대선 후 '약한 정부, 강한 사회' 가 두드러질 것" 이라고 전망했다.

◇ 킹메이커 노리는 리덩후이(李登輝)총통〓李총통이 지지하는 후보는 물론 連후보다. 두 사람은 군신(君臣)의 끈으로 맺어진 사이다. 반면 李총통과 민진당의 陳후보는 무관한 사이다. 그런데 요즘 대만 정가에서 李총통의 陳후보 지원설이 파다하다.

왜 그럴까. 우선 連후보의 '퉈리(脫李)' 움직임을 들 수 있다. 連후보측은 이미 낡은 이미지의 李총통과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득표에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다. 李의 양안정책 중 상당부분을 수정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퇴임 후 상왕(上王)의 지위를 노리는 李총통이 불안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陳후보의 대만 독립 주장이 李총통의 양국론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이 또 하나의 이유다. "陳은 李의 '이념적 아들' " 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대만내 정치평론가들은 "李총통이 막판에 陳후보 지지를 표명할 가능성이 있다" 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 중국의 계산〓'대만정치의 가장 큰손이 중국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대만인은 없다. 장쩌민(江澤民)주석의 말 한마디에 주가가 널뛰고, 민심이 술렁인다.

중국이 누굴 지지하는지는 불분명하다. 홍콩내 친중국계 신문을 통해 "宋이 당선되면 즉시 협상대표 파견, 連이 뽑히면 적대적 관망, 陳이 선출되면 전쟁 불사" 라는 입장을 여러차례 흘렸다.

이렇게 보면 宋후보가 중국의 마음을 잡은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선 중국이 오히려 連후보를 민다는 주장도 있다. 宋이 당선되면 체제정비에 나서는 등 국내정치가 시끄러워져 대만통일 문제가 쉽사리 양안간의 대화에 오르기 힘들다는 논리다. 게다가 최근 連후보는 어느 정도 李총통의 양국론과 거리를 두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미사일까지 동원한 지난 96년 대선의 북풍(北風)은 실패였다. 오히려 李총통의 압승을 도운 셈이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독주 후보가 없고, 노선이 각기 다르다. 홍콩의 대만정치전문가인 량녠쭈(梁年祖) 양안관계연구소장은 "대만인들은 실리적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안전한 후보를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고 말했다.

◇ 결국 돈이다〓 '슈퍼 선데이' 인 12일 대만 남부 가오슝(高雄)에서 60만명이 움직였다. 陳후보와 連후보측이 각각 30만명씩 동원하는 대규모 세대결을 벌인 것. 이날 중부 타이중(臺中)에서는 宋후보가 20만명을 모았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가위 천문학적이다. 각당 선거자금은 극비이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없다.

그러나 최근 국민당은 당의 해외자산 60억 신타이비(新臺幣.약 2천4백억원)정도를 매각했다. 돈이 넘쳐흐른다는 국민당이 해외재산을 매각해야할 만큼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폭력배들이 선거에 개입하면서 돈선거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 추세다. 이들은 조직을 이용해 대규모 관중을 동원한 뒤 거액을 챙기고 있다. 선거의 최대 수혜자는 사실상 이들이다.

홍콩〓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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