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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출신 후보의 '정치입문 20일' 고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먹물에 담긴 티슈가 순식간에 까맣게 번지는 느낌 그대로입니다. "

4.13 총선에 출마하는 검사 출신 A후보는 정치판에 뛰어든 소감을 말했다. 검사 시절 굵직굵직한 사건을 처리하며 많은 정치인을 감옥에 보낸 그는 '법대로 정치' 를 꿈꾸며 얼마 전 정치판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지금 크게 실망하고 있다.

그는 "솔직히 순간순간 위법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며 "검사였다는 자존심 하나로 버티지만 가끔 기성 정치인을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고 말한다.

20일 전 공천을 받은 정치 신인 A씨가 보는 정치판은 한마디로 요지경이었다.

◇ 편법 노하우 전수〓그는 지난 한달 동안 많은 선배 정치인들로부터 '선거 노하우' 를 전수받았다. 지역구 관리를 위해 필요한 내용도 있었지만 저질.편법적인 내용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선배들은 "신앙이 뭐 중요하냐. 다른 종교단체의 표를 잡아야 한다" 며 '개종' 을 권고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고민 끝에 지역에 가장 많은 수의 신도를 갖고 있는 모 교회의 표를 얻기 위해 종교가 없던 아내를 설득, 그곳에 등록시켰다. 그런데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경쟁 후보 역시 발빠르게 이미 그 교회에 와 있었다.

선배들은 또 "법을 다 지키고 어떻게 선거를 치르느냐" 며 "정치를 하려면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면 안된다" 고 충고했다. "법정 선거비용 안에서 쓰고 싶은데 가능하냐" 고 물으면 거의 모든 선배 정치인들은 '그런 것도 모르느냐' 는 듯 야릇한 미소만 지었다.

그는 "정치인 수사가 왜 어려웠던가 그 이유를 알겠다" 며 "노련할수록 거짓말을 잘한 것" 이라고 씁쓸해 했다.

◇ 들끓는 브로커〓검사 시절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선거브로커들의 실태도 소상하게 알았다. 지구당 간판을 내걸자마자 정치 신인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조직을 갖고 있으니 표를 몰아주겠다" 며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어이가 없던 그가 "내가 검사 출신이라는 걸 모르느냐. 고발하겠다" 고 말하자 그제서야 브로커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 정책 대결은 헛구호〓그는 청소년문제 대책 등 각종 정책과 비전을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지역구의 누구도 들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정책 청사진을 뒤로 한 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얼굴 알리기에만 주력하고 있다.

게다가 현역의원들에 비해 신인들은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놓을 무대조차 전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하루 18시간씩 사람을 만나 명함 건네고 악수하는 일만 하고 있다.

◇ 돈 선거 해결은 요원〓그는 "이번 선거에 나온 후보 중 단 1명도 법정 선거비용 제한액을 지키지 못할 것" 이라고 단언한다. 그의 경우 촌지를 돌릴 여력도, 건넨 적도 없지만 퇴직금(공개 거부)이 10여일 만에 거덜났다.

그는 "사무실 임대료.조직 운영비로만 밑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돈이 빨려들어간다" 며 "다른 후보들이 어디서 돈을 끌어오는지 정말 모르겠다" 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회부 총선팀〓이상복.박현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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