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반정부 언론인 비행기 추락사…배후설등 의문 증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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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9일 발생한 모스크바 인근 세르메체보-1 공항 여객기 추락사고의 원인을 놓고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승무원과 승객 등 모두 9명이 숨진 이 사고의 배후에 뭔가 음모와 공작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러시아 민영방송인 NTV는 사고 당일 방송된 프로그램 '오늘의 영웅' 에서 사고경위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의문사의 주인공은 주간 '사베르셴노 시크례트노' (1급 비밀)의 사장 겸 주필인 아르촘 보로비크. 그는 언론사주인 동시에 자신이 직접 취재한 탐사보도로 필명을 날려온 언론인이었다.

1급 비밀이란 주간지의 이름이 말해주듯 정치 비사를 위주로 다소 선정적인 폭로성 기사를 주로 다뤄왔다.

보로비크가 남긴 기사 중 자주 인용되는 "러시아의 권력은 민주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피아와 범죄조직의 수중에 들어 있다" 는 구절은 그의 성향을 대변해준다.

보로비크는 러시아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부패를 신랄히 비판해 왔다.

최근엔 대통령 대행인 블라디미르 푸틴과 KGB ?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 측근들과의 친근관계 등을 보도하면서 반(反)푸틴 보도에 치중해 왔다.

이 때문에 지난해에는 러시아 국영TV가 보로비크측이 제작한 프로그램 방송을 거부하는 등 권력층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왔다.

'1급 비밀' 의 최신호 머릿기사는 푸틴을 "정책 부재를 가리기 위해 체첸전쟁을 교묘히 활용하고 있는 엉터리 자유주의 독재자" 로 묘사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비행기 사고가 발생해 숨진 것이다.

그가 탔던 사고기 야크40은 운항도중 세개의 엔진이 모두 정지해도 비상착륙이 가능하도록 설계됐을 만큼 안전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언론인연맹의 프셰볼로드 보그다노프 대표는 "보로비크 일행이 탄 비행기에 문제가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며 철저한 사고원인 규명을 촉구했다.

러시아 항공당국은 사고 즉시 현장에서 블랙박스를 회수, 해독작업에 들어갔으나 아직까지 사고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사고조사반은 사고 당시 폭발음이 없었던 데다 불이 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폭탄설치 보다 기계적 결함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보로비크가 탔던 사고기는 옛 소련 지역의 금융.석유재벌인 '아리얀스' 그룹 지야브디 바자예프 회장의 전세기였고 그는 카자흐산 석유공급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가던 바라예프 회장과 동행 중이었다.

그래서 러시아 현지에서는 석유업계의 전통적인 검은 거래와 관련해 이번 사고가 마피아와 관련됐을 수 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모스크바〓김석환 특파원,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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