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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 오딧세이] 詩쓰는 백혈병 박사 김춘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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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견강부회 버릇은 필자의 고질이다. 절집 바위를 보고는 "면벽정진하는 자세가 스님보다 낫습니다" 며 너스레떨거나, 어느 성공회 '나눔의 집' 화단을 보며 "상추와 맨드라미가 어울린 게 종교적 화해입니다" 라는 식이다.

국내 혈관질환 치료의 한 본산 여의도성모병원도 그랬다. 병원을 끼고 도는 강과 도로는 지상의 혈관이며 달리는 자동차는 영락없는 적.백혈구였다.

한 사람의 몸과 정신 안에 의사와 시인의 공존, 그것도 백혈병 전문의와 순수 서정시인의 공존은 얼핏 물과 불의 이미지처럼 상호 충돌적이다.

그러나 혈관의 미로를 탐색하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술과, 언어의 미로에서 존재의 원형질을 찾아내는 시심(詩心)이 만나는 지점, 그곳에서 그 둘은 도가적 합체가 된다.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의 행복한 자웅동체가 된다.

직업이 의사뿐인가. 우리는 (모든 형이상.하학적 형태의 도둑질하는 사람들을 빼고는)무언가 하며 생계를 잇고 우리 사회에 뭔가를 기여하고파 한다. 적어도 해는 끼치지 않으려 한다.

이런 차원에서 의사와 자동차수리공은 존재의 값어치가 같아진다. 그들은 삶의 투명성을 같이 인식한다. 세상과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투명한 마음이 시심(詩心)이라면, 순수한 사람은 시를 쓰든 안쓰든 이미 시인이다.

"혈액환자만 받겠다" 의사 김춘추(56.가톨릭대 조혈모세포이식센터 소장)이자 시인 김춘추인 인간 김춘추는 백혈병과 시와 맥주와 더불어 그밖의 '모든 명리' 는 바람결에 날리며, 춘추(春秋)라는 이름의 고전적 아름다움에 참으로 걸맞게 한 생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사람이다.

1997년 쉰세살 초로에 첫 시집 '요한병동' 을 시작으로 벌써 네 권의 시집을 상재한 그는 97년 당시 벌써 백혈병 치료의 국내 최고 권위자였다

초지를 일관하겠다는 자못 늠름한 기상이 들어 있다. 이 구호를 김춘추에게 적용하면 '한번 백혈병 치료에 뜻을 뒀으면 영원한 백혈병 전문의' 요, '한번 문학청년(文靑)이면 영원한 문청' 이 된다.

좌(左)백혈병.우(右)시작(詩作)으로 상징되는 그의 삶은 전적으로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필자에게는 그것이 거대한 운명적 드라마처럼 보여진다.

학부 시절 백혈병 전문의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백혈병 환자를 소재로 한 희곡을 쓰고 무대에 올린 것이라든가, 환자로 절망적 상태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시인(김형영)과 시인의 친구들(서정춘.박건안)과의 교유를 통해 사춘기 이래 남몰래 지켜온 시심에 불을 지펴 시인으로 탄생하는 과정이 그렇다.

또 견강부회하자면 그의 두번째 시집 '하늘목장' (98년)의 타이틀 시 전문(全文) "밤하늘이 별을 기르듯 가슴에서/가슴으로 곰, 사자…돌고래까지/기르는 사랑아!//별은 지가 별인 줄도 모른 채/별자리로 눈이 살아, 샛강에서 둠벙에서/찰랑찰랑 반짝인다" 처럼 존재에 대한 섭리마저 느껴진다.

그는 충북 옥천성모병원에서 근무하던 78년 백혈병 치료에 생애를 걸기로 작정하고 일반환자들에게 강아지 두 마리씩을 나눠줬다. 강아지들이 크면 다시 사들여 골수이식수술의 실험용으로 쓸 요량이었다.

지금도 의료계에서 '옥천개목장' 으로 회자되는 그때의 개들을 포함해 그는 82년까지 모두 3백여마리의 개를 '죽였다' .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개를 희생시켰지만 그 자신은 생명의 등질(等質)에 관한 근원적 고뇌에 싸였다고 했다. 실험에 알맞은 비싼 도사견을 사들이기 위해 6년간의 처가살이를 자청한 것은 둘째 문제였다.

80년 서울 명동성모병원에 올라와서는 진료실 문에 아예 혈액질환 환자만 받겠다는 패를 내붙였다. 감기.몸살 환자 정도는 약국에서 약을 사먹으라는 오기였다. 하루 3명이든 5명이든 혈액관련 환자만 봤다.

"건방지다" 는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가 30대 후반, 의사로서는 아직 젊었기에 그것은 일종의 관행과의 투쟁이었다. 그 집념의 결정체가 83년 첫 골수이식수술의 성공이었다.

- 첫 수술 성공 후 소감이 어땠습니까.

"아버님의 한을 풀어드렸다는 것과 죽은 개들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범벅됐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한꺼번에 휘몰아치는 그런 눈물은 처음 흘렸어요. "

시상대에 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눈물이 아마 그런 것일 듯하다. 아버지의 한을 푼 것이란 일제시대부터 좌익활동을 하다 그 여파로 우울하게 생을 마감한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상적 질곡과 기운 가세 속에 사춘기를 보낸 김박사는 여수고 2학년 때 중이 되기 위해 순천 송광사의 한 암자로 가출까지 했다.

1년 후 승려 도첩을 받기 위해 주민등록등본을 떼러 여수에 내려온 그에게 아버지는 '중도 좋고 문학도 좋으나 의사가 돼 좋은 일을 해달라' 고 간곡하게 당부했다. 그때 그는 문학의 뜻을 접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한을 푸는데는 35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했다.

- 그 첫 환자는 지금도 잘 살고 있습니까.

"외항선원이었는데 건강하게 있다가 다시 바다로 나간 걸로 들었습니다. "

- 백혈병이 생사를 가르는 절박한 병인데 많은 환자들을 대하다 보면 생사관(生死觀)같은 것에 오히려 담백해질 것도 같습니다.

"환자가 들어오면 우선 하느님에게 기도합니다. 이 사람은 이런 이런 이유가 있으니까 지상에 더 머물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끝내 떠나면 하느님이 그를 더 필요로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치료에 성공한 환자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늘로 떠난 환자들만 기억합니다. 같은 '실패' 는 두 번 다시 반복할 수없다는 각오 때문이고 제자들에게도 이 점을 가장 강조합니다. "

*** 제자 피 뽑아 실험하기도

현재 여의도성모병원의 김박사팀(혈액전문교수 8명)은 86년부터 1천1백명의 환자에게 골수이식수술을 해 8백명(70%)이 완치됐고, 3백명 정도는 재발해 그 중 1백명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등진 환자에게는 엄청난 비극이지만 이같은 완치율은 괄목할 만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이 병원은 현재 세계 5위 규모의 무균실 병상 1백20개를 꾸리고 있다. 백혈병 치료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무균실 개념 도입도 그의 연구 결과였다.

인터뷰 나중에 자리를 함께 한 그의 제자는 의사 김춘추가 굉장히 무서운 분이라고 했다. 심야에 들어온 환자의 혈소판이 아침 회진에서 안전수준에 있지 않으면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고, 피가 모자라면 학생들의 피를 뽑았다고 했다.

면역억제물질을 연구하기 위해 정액까지 받아오라고 시켰으며 가령 백혈구 촉진제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선 자신을 포함해 제자들을 '실험용' 으로 썼다고 했다.

- 치료가 '실패' 할 때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그냥 술 한잔 합니다. 92년 '조혈모세포이식과 혈액질환' 이란 책을 펴내면서 앞머리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작은 책자를 돌아가신 환자분들에게 바친다. 언제 어디에서나 그들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다. 상좌승이 큰스님 모시듯 그 분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 그는 병원이 곧 성당이라고 했다. 교회에 나가듯이 병원에 가 환자들을 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그냥 '시인 김춘추' 로 쓰여졌으면 하고 바란다. 좋아하는 맥주도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의사의 기분 40%, 시인의 기분 60%로 마신다.

술로 의사 김춘추는 '쓸쓸한 스트레스' 를 풀고, 시인으로서는 '행복한 스트레스' 를 푼다고 말했다. 한(恨)의 투명한 덩어리를 붙잡고 엔도르핀이 약동하는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시인만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개인사적으로 의사는 아버지의 한이 계기가 된 '반강제' 의 작업이었다면 시작(詩作)은 그의 원형질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 새벽에 떠오른 첫 시

그의 시심에 불씨가 지펴진 것은 83년이었다. 앞서 말했듯 시인 김형영이 악성의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리자 김춘추의 명성을 알고 있던 시인 서정춘이 김시인을 데려왔다.

의사와 환자와 환자의 친구로 조우한 세 사람은 대번에 서로의 속을 꿰뚫어보고 그 때부터 의기투합해 시 이야기로 우정을 다지며 교분을 쌓았다. 그러다 과작으로 유명한 서정춘이 96년 등단 29년만에 첫 시집 '죽편(竹篇)' 을 내자 그 감흥을 못이겨 '서정춘에게' 라는 부제가 붙은 시 '세한도(歲寒圖)' 를 써 그에게 건넸다.

그것이 시인 김춘추의 출발이었다. 부운거사 같은 서정춘의 사람됨에 붙여 '너의 청빈/영하 40도 오장 육부가 언다/지난 여름 뭉게구름 한아름 훔쳐 이불로 싸덮으면/헉헉 영상 40도의 요, 적막/시방은 민속촌에도 없는 너와집 한 채' ( '세한도' 전문)였다.

- 그 시를 보고 서시인이 뭐라고 품평하던가요.

"그 때 서정춘이 술병이 나서 병원에 있었는데, 보더니 그냥 씩 웃더군요.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그 시는 새벽에 불현듯 나온 겁니다.

보통 새벽에 일어나면 그 날 병원에서 할 일을 머리 속에서 점검하는데 그 날은 병원 일은 생각이 안나고 시가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 날부터 시가 막 써내려지는데 한달만에 첫 시집을 냈어요. "

- 한달만에 시집을 낸다는 건 문학이란 무거움에 비춰보면 좀 객기가 아닌가요.

"문학을 향한 걷잡을 수 없는 심정이 그만큼 절실했습니다. 시 원고들을 놓고 서정춘을 다시 불렀어요. 네가 보고 시시하면 쓰레기통에 던져넣어라 그랬지요. 보더니 '되긴 됐다' 그래요. 그리고 그 때 마침 과기처에서 나에게 준 과학자상 상금 5백만원이 있었어요. 이 걸로 출판했으니 나로서는 굉장히 보람있게 쓴 셈입니다. "

97년 '요셉병동' 이후 '하늘목장' '얼음울음' , 그리고 최근 펴낸 '산속의 섬' 까지 3권의 시집을 더 낼 만큼 왕성한 그의 작업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매우 우호적이다. 한(恨)의 투명성을 시적 에너지의 생명력으로 삼는 그의 모성회귀적.자연친화적.동화적 상상력이 우리 서정시단의 한 부분을 소중하게 가꿔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김춘추의 별명은 구겨진 가운을 휘날리는 수더분한 모습 때문에 '의사 콜롬보' . 2C로도 불린다. 자동차(car)운전면허증과 신용(credit)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7년째 점심을 거른다. 이유는 오직 하나. 점심을 먹으면 낮 회의와 진료를 방해하는 낮잠이 오기 때문이다.

이헌익 본사 편집위원

<김춘수는 누구>

▶44년 경남 진행 출생

▶여수고,가톨릭의대·대학원 졸

▶83년 국내 첫 조혈모세포이식 수술 성공

▶84년 국내 첫 악성림프종환자 자가 조혈모세포이식 성공

▶85-86년 영국 왕립 해머-스미스병원 객원교수

▶혈액종양 연구에 분자생물학적 기법 국내 첫 도입

▶92년부터 국제골수이식등록학회 자문위원

▶94-96년 아태 골수이식학회 사무총장

▶84년 대한의협 학술대상 등 수상 다수

▶시집 ‘요셉병동’(97년)외 4권 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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