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국 택배원 경험, 그 위에 서다

중앙일보

입력

관련사진

photo

포브스코리아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한 장석민(48) 대표의 사무실엔 매사진선(每事盡善)이라고 쓰인 큼지막한 액자가 걸려 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간단명료하지만 장 대표를 지금의 자리까지 올려놓은 인생 철학이다. “지금도 출근할 때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도 제가 부족하다고 평가 받는다면 언제든지 사표를 내겠다는 각오입니다.”

장석민 UPS코리아 대표

1907년 창업자 제임스 케이스가 세운 UPS는 미국 시장 1위의 물류 회사다. 매년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6~7%를 운송할 정도다. 전 세계 직원 42만여 명에 지난해 매출만 60조원을 올렸다. 자체 보유한 제트 항공기만 208대로 세계에서 9번째로 큰 항공사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항공 화물 운송이 많아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에 이어 가장 큰 규모의 항공사다.

이민 2세대인 장 대표는 현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 회사의 택배 배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만 해도 신입사원들은 입사 후 배달 업무부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선 힘든 배달 업무를 통해 신입사원들이 회사에 적합한 인물인지 판단합니다. 사원들도 배달을 통해 회사 시스템부터 고객 대하는 법을 깨닫게 되죠.”

처음엔 일이 너무 힘들어 매일 아침이면 사표를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새벽에 출근해 밤늦까지 이어진 업무였지만 점심 먹을 시간조차 없이 바빴다. 대학 졸업장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비스 정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운송 과정에서 신발 자국이 생긴 소포를 고객들에게 건네줄 때면 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힘든 배달 업무를 통해 능력을 검증받은 장 대표는 85년 미국 북저지의 산업공학팀 과장을 시작으로 89년 미국 루이스빌 항공운항계획사업부 부장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94년 UPS가 대한통운과 손잡고 한국에 진출하면서 UPS대한통운 대표이자 UPS항공의 한국지사장을 맡아 귀국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서른두 살에 한국 지사장에 오르다

UPS코리아 관계자에 따르면 “동양인으로 그 나이에 지사장을 맡은 것은 UPS 역사상 최초”라며 “지금도 UPS에서 서열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장 대표는 “운이 좋았다”며 “UPS에서 한국 시장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과 관련된 제게 기회가 온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장 대표가 밝힌 성공 비결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을 안 해서 그만두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일을 못해서 그만두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잘하려다 보면 누구나 실수는 하게 돼 있어요. 좋은 회사라면 직원들의 실수를 잘 보듬어 줘야겠죠. 모든 사람은 실수를 통해 더 성장합니다.”

UPS대한통운이 한국 시장에 입지를 구축한 2000년 그는 임원으로 본사로 돌아갔다. 200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최근 UPS가 대한통운 지분을 인수하면서 UPS코리아 대표로 부임했다.

“UPS에 한국 시장은 매력적입니다. 아시아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으로 향하는 관문이고, 자체적으로도 시장 규모가 상당하기 때문이죠. 향후 아시아 물류의 트랜짓(tranzit) 허브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장 대표가 처음 입사했던 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다뤘던 소화물은 하루 30~40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전 세계 Ups 지사 중 15위를 자랑한다. 그는 “최근 UPS 본사에서 삼성곀測?LG만을 위한 전담팀들을 꾸린 것만 봐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UPS코리아는 국내 물류 시장이 전반적으로 정체돼 있던 상반기에 5% 성장하는 쾌거를 이뤘다.

장 대표는 “DHL과 페덱스 등 경쟁사에 비해 한국 시장 진출이 늦어 점유율은 낮지만 증가하는 추세”라며 “본사에서도 최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UPS코리아는 지난해 대한통운과 결별한 후 천안겷♧?인천겮볐?등 한국 내 영업 사무소 네 개를 신규 설립했다.

이를 통해 인천공항과 가까운 서울 외곽 지역의 기업들을 적극 지원해 주겠다는 방침이다. 그는 “지난 8월의 경우 전년 대비 10%가량 올랐다”며 “최근 대기업 물량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추석을 지나봐야 구체적인 경기 전망이 가능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매일 사표 품고 출근한다

관련사진

photo

UPS코리아는 내부적으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UPS는 매달 전 세계 지사들에 대해 매출, 순이익, 서비스, 인력 운용, 비용절감 등 18개 항목에 걸쳐 세심하게 심사해 결과를 통보한다.

올 상반기에 UPS의 전 세계 지사들 중 한국이 최고 평가를 받았다. 평가 순위가 높을수록 직원들에게 돌아가는 인센티브도 많아진다. “지난해에 2위를 차지했지만 올해는 1위를 할 것 같습니다. 상반기 중 2월을 제외하곤 모두 톱5에 들었어요. 직원들 의욕도 어느 때보다 충만합니다.”

장 대표가 강조하는 리더십은 ‘파트너십’이다. “저와 직원들의 관계는 상하 관계가 아닙니다. 맡은 일이 다를 뿐이죠.” 파트너십은 100년 이상 UPS를 지탱해 온 기업 문화이기도 하다. 한 번은 장 대표가 본사에 있는 상사와 함께 유럽 출장 길에 올랐을 때다. 비행기에서 스튜디어스가 “같은 회사에 다니느냐”고 묻자 장 대표는 “이 사람을 위해 일한다(I work for him)”고 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상사는 정색을 하고 “아니다. 우리는 UPS를 위해 함께 일한다(No, We work for UPS)”고 고쳐줬다. UPS에선 경영진이 되면 연봉과 별도로 UPS 지분을 스톡옵션으로 받는다. 현재 UPS 경영진이 전체 지분의 80%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회사가 잘돼야 자신이 보유한 주식가치와 인센티브가 높아지니까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UPS의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도 독특하다. UPS 모든 직원은 유사시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직원 세 명을 본사에 추천해 이를 후계자로 둔다. 일선 직원부터 CEO까지 예외가 없다. “자신의 후계자들이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도록 도와줍니다. 100년 역사의 UPS가 미국 시장에서 1위를 놓치지 않는 이유죠.”

한국은 UPS의 테스트 마켓으로도 활용된다. 고객 반응이 빠르고 요구가 까다롭기 때문에 새로운 서비스의 경우 피드백을 즉각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고객이 배송된 물품을 데스크톱에서 즉각 확인할 수 있는 위젯 서비스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선보일 예정이다.

장 대표의 목표는 55세 정년 퇴직 후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다. 그는 “사표를 품고 출근하지만 퇴근 후엔 아무런 고민 없이 잠자리에 드는 것이 목표”라며 “퇴직 후엔 동포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글 손용석 기자/ 사진 정치호 기자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