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의 행복한 책읽기] 박지원 문집 되살린 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우리나라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사람치고 연암(燕巖)박지원(朴趾源.1737~1805)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 연암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정작 얼마나 될까. 그의 글을 한편이라도 정독해본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유럽에서 일군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봉건적 제도·사상과 한창 싸우던 시절, 동아시아의 한 귀퉁이에 자리한 우리 나라에도 주자학적 이념에 기초한 통치질서에 반기를 들고 '실사구시' (實事求是) '이용후생' (利用厚生)의 정신에 바탕을 둔 학문활동을 추구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후대에 실학자라 불리는 이들 가운데 연암 박지원은 노론계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루소·볼테르·칸트와 비슷한 시대를 살다간 그는 당시 유럽에서 그들이 각각 수행한 작업을 거의 혼자 힘으로 떠맡고 나섰다. 그가 문학이나 정치사상은 물론이고 자연과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며 남긴 글들은 근대정신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이번에 국문학자 정민(한양대) 교수에 의해 한 권으로 묶어져 나온 '비슷한 것은 가짜다' (태학사)는 박지원의 산문선집이자 해설서로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통용돼왔던 연암 사상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일반독자들에게 까지 널리 확장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연암의 식견과 인품을 잘 드러내주는 글 23편을 가려 뽑아 번역한 뒤 풀어쓴 이 책은 연암 사상의 핵심을 갖가지 현대 사상이나 문학이론에 비춰 재해석해 3백년전의 인물을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사상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코끼리를 두고 사물을 인식하는 태도의 다양성을 논한 연암의 글이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과 어울리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조선시대 한 선비를 주인공으로 한 일화가 카프카의 소설 '변신' 과 견주어지는 장관이 연출된다.

연암의 글 가운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일야구도하기' (一夜九渡河記)에서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물을 건너며 경험한 내용과 사색에 대한 묘사는 다시 읽어도 박진감이 넘치고 '낭환집서' (□丸集序)에서 장님이 비단옷을 입은 것과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경우를 비교하여 참되고 바른 견식(見識)을 얻는 일의 지난함을 설파한 대목도 요새처럼 만사가 얽히고 설킨 세상에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흔히 '연암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문장은 고문의 정통에서 벗어나 패관잡서의 문체까지 과감하게 소화한 것이기 때문에 당대의 지배이념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초래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문학이 추구해야 할 것은 무슨 거창한 소명의식이나 교훈주의가 아니라 '천진' (天眞)과 '진정' (眞情)의 토로일 뿐이며, 시대가 변하면 생각도 변한다면서 "옛사람 흉내를 더 잘낸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질타하는 대목은 읽는 이를 숙연케 한다.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벌떼같이 달려드는 과거시험장에서도 백지를 제출하거나 고송을 그리며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는 박지원. 그의 경이로운 사유와 엄중한 처신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남진우 <문학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