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5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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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54) 뜻밖의 기회

1983년 4월 초순 어느날 오후. '봄 햇살이 따사로워 온몸이 나른했다. 모처럼 창밖을 내다보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정오(李正五.71)과학기술처 장관이었다.

"韓박사, 나 장관이요. 대통령께서 4월13일 대덕(大德)공학센터를 방문할 거요. 한 20분 정도 머무르실 예정이니 韓박사가 직접 대통령께 브리핑을 하시오. "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두환(全斗煥.69)대통령이 연구소를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대덕공학센터장에 취임한지 1년만에 가장 큰 손님을 맞이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나더러 브리핑을 하라니 전혀 뜻밖이었다.

통상 대통령이 연구소를 방문할 경우 부소장인 나 대신 소장이 직접 브리핑을 하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李장관은 에너지연구소 부소장이자 대덕공학센터장인 나에게 브리핑을 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李장관은 "원자력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전적으로 韓박사에게 달려 있다" 며 "대통령께 원자력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시키라" 고 힘주어 말했다. 李장관이 전해 준 바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제비서관들과 경제기획원측에서 '원자력을 키우지 말자' 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원자력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경제 논리로만 생각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李장관은 "이번 기회에 이런 분위기를 확 바꿔 놓아야 한다" 고 나에게 당부했다. 나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새 정권이 들어서고 난 이후 원자력계가 극도로 위축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미국은 우리의 원자력 기술 개발을 철저히 견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우리 연구소를 방문하는 것이므로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열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간부들과 함께 브리핑 자료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 협의했다. 실제 브리핑 시간은 불과 10여분 밖에 안되므로 핵심 내용만 담아야 했다. 결국 최근 우리 연구진이 독자 개발한 중수로(重水爐)핵연료와 탱크 파괴무기인 대전차 관통자(對戰車貫通子)에 대해서만 집중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시제품(試製品) 개발에 성공한 단계지만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했다는 것 자체가 큰 성과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간부들에게 브리핑 자료를 철저히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연구소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아무래도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니 구석구석 챙겨야 할 데가 많았다. 그러던 차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청와대 모(某)비서관이 내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의 이번 대전 방문은 김성진(金聖鎭.68.전 과학기술처장관)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위로하는 게 주 목적" 이라고 귀뜸해 주었다.

全대통령과 金소장은 같은 육사 11기 동기였다. 당시 金소장은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차장에서 국방과학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안기부 차장 시절 중앙정보부를 안기부로 개편하는 어려운 작업을 책임진 장본인이었다. 또 81년 1월 全대통령과 미 레이건 대통령의 워싱턴 회담을 성사시킨 숨은 공로자였다.

바로 이같은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全대통령이 대전에 내려 온다는 것이었다. 나와 金소장은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 멤버이자 함께 미국에서 공부를 했는지라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서 이같은 내막을 알고 있었다. 결국 全대통령은 ADD에 가기 전 잠시 대덕공학센터를 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뜻밖의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나는 이 기회에 원자력의 중요성을 대통령께 확실히 인식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83년 4월13일 오후 4시. 全대통령이 드디어 대덕공학센터를 방문했다.그로서는 첫번째 방문이었다.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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