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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공동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9면

'소외에 이르는 병' '군중 속의 고독' . 최근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나온 한 연구 결과를 집약한 말이다.

인터넷에 빠진 미국인 4천1백13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심리상태와 행동유형을 들여다보니 가족.친구와의 접촉이 현저히 줄었고, 심지어 쇼핑도 꺼린다는 것. 미국인 중 인터넷 사용자는 전체 인구의 55%에 이르는데 그 중 33%는 매주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 인터넷을 끼고 산다고 연구서는 밝히고 있다.

이 정도의 몰입이면 '병' 이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인터넷 인구가 1천만명이 넘는 우리나라에서도 '인터넷중독증' (IA.Internet Addiction)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니 고독과 소외의 문제는 남의 일만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과연 인터넷이 사회와 인간관계로부터 사람들을 소외시키며 격리를 부추기는 '창살없는 감옥' 의 역할만 하는 것일까. 이런 일부의 지적에 대해 인터넷에 빠진 매니어들은 " 'e-공동체' 속의 세계를 몰라서 하는 말" 이라며 항변한다.

서울 동부이촌동에 사는 30대 주부 金모(35)씨. 유치원에 다니는 딸 하나를 두고 있는 金씨의 하루 일과는 인터넷으로 시작해 인터넷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난 뒤인 오전 9시. 金씨는 초고속전송망이 깔린 사이버 아파트에서 컴퓨터를 켜고 자신만의 공간속으로 빠져든다. 증시 개장 때부터 끝날 때까지 金씨는 사이버 주식투자에 매달린다.

金씨는 "돈은 벌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경제의 흐름을 아는 게 즐겁다" 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金씨의 사이버 세상이 열리는 때는 오후 10시. 가족들이 잠자리에 들면 한메일의 '카페' 사이트에 접속, '누님' 의 등장을 알린 뒤 동생뻘 되는 애들과 채팅을 시작한다.

전공인 주식에서부터 인생상담까지 두 시간여 동안 그가 넘나드는 'e-공동체' 는 10여곳. 金씨는 "격의없는 대화를 통해 동호인들의 '정신적 지주' 로 통한다" 며 "오히려 마음이 젊어져 가족들에게도 잘 하게 된다" 고 자랑이다.

이처럼 e-공동체는 사람들에게 소외가 아닌 정신적 건강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벤처기업 스트림박스의 하혜령(28)실장. 모 사이트의 수영.식도락 동호회원인 하씨는 한때 매일 4시간 이상 채팅에 매달린 '중독환자' 였다. 그러나 하씨는 "그 정도는 문제될 게 없다" 고 한다.

사춘기 아이들처럼 한동안 인터넷 열병을 앓다 보면 그 세계의 장단점을 알게 돼 나름대로의 선별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

그러나 전부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특히 사고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에게는 인터넷은 심각한 해가 될 수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본부가 2일 발표한 '청소년의 인터넷 중독' 에 관한 보고서는 충격적이다.

수도권지역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친구보다 인터넷이 좋고(49.1%),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친구를 사귀며(63.9%), 친지와 어울리기 보다는 인터넷을 하겠다(30.3%)고 답했다.

결국 문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 정신과 전문의 김정일씨는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인터넷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최근 늘고 있다" 며 "고통과 인내를 통해 성숙해 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인 만큼 오프라인(대인접촉)의 관계도 중요시 하는 균형감각이 절실하다" 고 지적한다.

또한 e-공동체는 조직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업무와 이슈 중심으로 뭉치다 보니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혈연.지연.학연 등 감성지향적 만남이 쇠퇴할 가능성이 있는 것. 광운대 신문방송학과 김현주 교수는 "사이버상에서는 다수와 다수의 만남이 수평적으로 가능한 '평등사회' " 라며 "이 공간에서 살고 있는 10.20대들이 사회의 중추로 등장할 때에는 엄청난 사회변화가 예상된다" 고 진단했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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