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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수퍼 개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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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곳은 세계의 끝이었다. 검은색으로 아주 단단하고 매끈매끈하며 미지근하고 광물성 기름의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자연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땅 한 뼘 보이지 않았다. 어마어마하게 사나운 공기의 흐름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면 갑자기 진동이 느껴지고 진동의 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면서 땅이 흔들렸다. 이어 끔찍한 소음과 함께 사나운 바람이 지나가면서 그곳을 밟은 동료들을 으깨버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서 개미들이 아스팔트 도로를 묘사한 대목이다. 개미에게 아스팔트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많은 어린이들이 개미 관찰을 통해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체의 집단 생활을 처음 접한다. 개미들이 일사불란하게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행렬은 어린이들에게 놀라움의 대상이다. 여기에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가 곁들여지면 개미들은 근면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증권시장에서는 흔히 개인 투자자를 개미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나라 증시에서의 개미는 근면의 상징보다 베르베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미에 가까운 실정이다. 기관투자가나 외국인 투자자들이 휩쓸고 지나갈 때 그 뒤만 쫓아다니다가 손해를 보는 게 개미군단, 개인투자자였던 일이 허다했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의 첨단 투자기법은 개미군단에겐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최근 증시에 '수퍼 개미'들이 출몰하고 있다. 이름만 보면 덩치를 키우고 첨단 기법으로 무장해 기관 및 외국인 투자자와 경쟁하는, 개미군단의 우상일 법하다. 하지만 실체는 공시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개미군단을 골탕먹이는 '변종 개미'에 불과하다. 수법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한 회사의 주식을 5% 이상 산 뒤 '경영권을 확보하겠다'고 공시해 마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나설 것처럼 밝힌다. 이어 M&A로 인한 주가 상승을 기대한 개미군단이 주식을 사 주가가 오르면 수퍼 개미는 주식을 팔고 유유히 빠져나간다. 법망에 걸리지 않도록 중간에 공시 내용을 '단순 투자' 등으로 바꾸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수십억원의 차익을 낸 수퍼 개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금융감독당국도 수퍼개미의 변칙 플레이에 속수무책인 모양이다. 가뜩이나 증시를 떠나는 개미들이 늘고 있는 판국에 수퍼 개미까지 판치면 개미군단 없는 증시가 될까 걱정된다. 감독당국의 분발이 필요하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