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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경제학] 7.스타시스템의 등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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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인터넷 검색엔진에 '예니 린드' 를 입력하면 극장.거리.학교.식당.요리.가구.병원.마을.성악콩쿠르가 나온다.

19세기 유럽과 미국을 휩쓸면서 디바 선풍을 일으켰던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소프라노 예니 린드(1820~87)의 이름을 딴 것이다. 린드의 조각을 뱃머리에 새긴 쾌속범선 '나이팅게일' 도 탄생했다. 스웨덴의 50크로노르 지폐에도 그의 얼굴이 나온다.

린드는 미국 흥행사 필네어스 바넘과 3년간 미국 순회공연을 맺으면서 계약서는 물론 레퍼토리.객원 출연자도 직접 결정했다.

1850년 9월1일 바리톤 벨레티, 지휘자 줄리어스 베네딕트 등 린드 일행을 태운 증기선 애틀랜타호가 뉴욕항에 도착하자 4만여명의 인파가 그를 환영했고 2만여명은 숙소를 에워쌌다. 음악기금협회 회원 2백명은 횃불 행진을 벌였다.

바넘의 과대선전 덕분이었다. 그는 린드가 개런티보다 더 많은 금액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기로 했다고 떠들어댔다.린드의 이름을 새긴 구두.코트.모자.소시지도 만들었다.

2백달러의 상금과 첫 공연 티켓을 상품으로 내걸고 노래 경연대회도 벌였다. 지정곡은 줄리어스 베네딕트 작곡의 '웰컴 투 아메리카' .티켓을 경매에 붙이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린드는 매니저에게 자신의 행방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바넘은 취재진을 따돌리기는 커녕 린드의 행선지를 미리 언론에 알려줬다. 바넘은 온통 유료 광고로 채워진 28쪽짜리 프로그램을 25센트에 팔았다.

린드의 레퍼토리는 '즐거운 나의 집' '새의 노래' 등. 친구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 중 '들으라 이스라엘' 도 자주 불렀다. 그녀는 바넘에게 '도중 하차' 를 선언했다.

9개월간 95회의 공연에서 바넘이 벌어들인 총수입은 71만2천달러. 그중 린드가 받은 개런티는 17만6천6백75달러(현재 가치로는 3백50만달러)였다.

린드는 바넘의 예상을 깨고 혼자 연주여행을 계속했다. 9세 연하의 피아니스트 오토 골드슈미트와 결혼도 했다. 1년 후 애틀랜타호를 타고 유럽으로 돌아간 린드는 바넘의 컴백공연 제의를 거절했다.

린드 덕분에 미국에 오페라하우스 건립 붐이 일었다.

또 린드의 대성공이 유럽에 알려지자 은퇴를 몇 달 앞둔 소프라노 헨리에타 존탁 등이 신대륙에 도착했고 리스트의 라이벌이었던 피아니스트 지기스몬트 탈베르크도 미국서 18개월 동안 3백회의 공연을 가졌다.

노르웨이 바이올리니스트 올레 벌은 연주료로 펜실베이니아에 땅을 사들여 고향사람들에게 집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미국 음악시장이 확대되면서 유럽의 연주료가 대폭 인상됐다. 이탈리아에서 주역 소프라노의 몸값이 10배로 뛰어올랐다. 마침내 스타 시스템이 탄생한 것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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