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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오디세이] 사이버 보안관 윤정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우리 나이로 65세, 머리가 다 벗겨진 '노인'이 사이버 공간의 범죄자 해커를 잡는다니 힙합을 추는 노인처럼 신기한다. 아주 의표를 찌른다.

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기술연구관 윤정경씨.그의 인터넷 홈페이지의 자기소개는 이렇다.“세상을 보는 시력이 0.3이하인 사람들 속에서 나는 2.0의 시력으로 세상을 보기때문에 때로는 내 말이 미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중에 보면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평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터넷 ID가 heyean(혜안.慧眼)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디지틀 시대,60대의 희안한 사이버 보안관답다.무명의 세월을 살아온 일말의 회한도 느껴진다.그보다는 시속의 명리에 초연한 자부심이 감지된다.이 느낌은 그의 ‘수상한’이력으로 더 증폭된다.

서울법대를 나와 62년 순경으로 투신,68년 경위 승진 후 94년 정년퇴임 때까지 26년간 경위로 일관,경찰관 생활 전부를 외사정보 업무에 종사한 외사계통의 산 증인,자타가 인정하는 아이디어 맨,퇴임 후 컴퓨터범죄 수사 개척,그리고 평생 결혼안한 독신.

무질서한 호기심이 해커처럼 기자의 두뇌회로망을 요령부득의 상황에 빠트렸다.그래서 사이버 테러,인터넷 범죄에 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천박한 질문이 앞섰다.서울법대씩이나 나와 왜 순경으로 시작했냐는 것이었다.답은 엉뚱했다.“당시 뇌물받는 기술자가 수사경찰들로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란다.숙부가 경쟁업체의 뇌물작전에 밀려 망했는데 장차 사업을 하려면 뇌물을 주고 받는 방법부터 배워야겠구나 해서 지원했다는 얘기다.말투가 하도 진지해 경찰관의 직업적 포커 페이스로 치부하면서도 대화상황은 더 악화돼 버렸다.

-그래 뇌물 좀 받았습니까.

“수사쪽으로 보내달라고 그렇게 떼를 썼는데 정보쪽 그 중에서도 외사업무에 배치돼 평생을 보냈으니 받고싶어도 못받은 셈이 됐습니다.”

외사정보업무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외교.안보와 관련된 국내 거주 외국인 동향도 파악하고 외국과 한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항을 수집,분석해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다.

-뇌물도 안받고 열심히 일하셨는데 끝내 경위로 마친 게 잘 납득이 안됩니다.

“승진엔 윗사람의 고과심사와 시험을 치루는 두가지가 있는데 70년대초에 시험승진 방식이 폐지됐어요.그래서 부활운동을 벌였지요.‘이 운동이 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뜻에서 부활되도 나는 시험을 안치르겠다’고 공언했지요.그걸 지켰습니다.”

-그러면 심사승진으로라도 됐을 텐데요.

“외사계통엔 대상에 비해 배당도 적고,또 ‘꿀단지’도 필요하고,그보다는 실무선에서 뭔가를 만들어 그것이 정책에 반영되는 재미 다시말해 현장에서 일하는 재미가 더 좋았습니다.”

‘꿀단지’가 ‘기름칠’을 뜻하느냐는 물음에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는다.그러나 그는 일선 기안자의 위치에 굉장한 자부심을 표시했다. 가령 70년대초 오일 쇼크 당시 ‘마이너스 경제성장이 치안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외국의 고용감축정책과 거꾸로 공장설비를 도입하자는 보고서를 냈고,이것이 받아들여져 73년에 14.9%의 경제성장을 일구는데 자신이 기여했다고 소개했다.

얘기가 너무 옆길로 셀 듯해 지금 전세계적 이슈인 컴퓨터 해킹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그는 외사정보업무로 일관했지만 컴퓨터와는 오랜 인연을 갖고 있다.68년 EDPS 전자 자료처리 정부위탁교육 1기생으로 콤퓨터에 입문해 그 해 주민등록 전산화 기본 계획 수립을 했고,78년에는 김포공항 수배자 적발 전산실 초대 실장을 역임했다.90년에는 중앙관서 최초로 경찰청 외사국에 근거리 통신망인 LAN도입을 주도했다.LAN도입은 직원들이 자료를 찾을 때마다 자신을 찾아와 전자통신망의 편리함을 깨우쳐 주기 위해 깔았다고 했다.

-해커 수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94년 퇴임 후 인터폴 콤퓨터 통신망 도입 계획에 참여하면서입니다.그 해 인터폴의 요청으로 국내업체의 전산망을 경유한 유럽 암연구센터 국제해킹사건 규명 참여를 시작으로 관계해 오다 97년 경찰청 컴퓨터범죄수사대 창설에 관여했습니다.”

-국내 전산망을 경유한다는게 무슨 뜻입니까.

“해커들은 공격목표에 바로 들어오지 않습니다.미국의 해커가 미국내 어떤 기관을 노릴 때 먼저 외국으로 일본,유럽,한국같은 곳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침투하는 복잡한 우회전술을 씁니다.그러면서 중간에 들린 곳은 전부 지우면서 최종목표를 공격합니다.교란책이지요.”

-그 경유지에 한국도 포함되는 모양이군요.

“포함 정도가 아니라 한국은 외국 해커들의 놀이마당 비슷합니다.한국에 들어와 공격 둥지를 틀고 전세계로 퍼져 나가는데 지난해에만 한국거점 국제해킹이 2백여건이 넘습니다.”

-한국의 탐지체제가 만만해서 그렇습니까.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법률적인 문제가 있어 그래요.우리는 통신비밀보호법때문에 해킹사건을 수사하는데 엄청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통신업체에 가서 접속상황을 체크하려 해도 까다로운 규정때문에 분당 수만명에 이르는 개인별 접속 분류를 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자연히 수사가 몇개월씩 걸리는데 그 사이 해커들은 계속 준동하는 거지요.”

-개선책이 없습니까.

“미국의 칼레아(Calea)법을 도입해야 합니다.칼레아법은 통신업체는 수사기관의 도청에 적극 협조하고 통신업체 상호간에도 용의자의 정보를 교류하도록 규정돼 있습니다.전산망 교란은 국가안보에 직결된다는 인식으로 필요한 경우 국민의 기본권을 유보할 수도 있다는 인터넷 시대의 사고지요.”

그는 하이재킹 수사에 관한 국가간 협정 즉 하이재킹은 경유한 어느 나라나 수사권을 가진다는 규약을 인터넷 범죄에도 적용하려는 협정이 올 여름 G8정상회담에서 마련될 것이라고 소개했다.이에 앞서 지난 9일 도쿄에서 G8의 외무.내무.법무장관회의가 열려 국제협약에 관한 방안을 마련했는데 우리만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라고 우려했다.

-말씀이 좀 딱딱하게 흘러갔습니다.해커 수사관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해커는 밤 10시부터 새벽5-6시까지 활동하는데 그 시간 동안 같이 콤퓨테에서 놀아줘야 합니다.밤잠을 못잡니다.그리고 주간에는 통신업체를 찾아다니며 단서를 바탕으로 역추적을 해나가는데 워낙 지능범죄라 수사과정이 지겨울 정도로 끈질겨야합니다.”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그러면 채팅도 하겠습니다.

“요즘은 안하지만 전에는 자주 했지요.신분을 감추고 중고생과 대화를 하는데 그래야 그들의 세계를 알게 됩니다.내 이름(윤정경)이 여자이름 같아서 남학생들이 많이 붙어요.저쪽에서 ‘몇살이냐’고 물으면 환갑하고 몇해 지났지라고 말합니다.그러면 아,스물세살쯤 됐구나 하며 대학생들이 만나자고 해요.채팅방에서 환갑은 스무살로 통하거든요.”

-그래서 만났습니까.

“나간 적이 있습니다.심야 커피 에 먼저 나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남학생이 들어오는데 경찰생활 오래 해서 대번 알거든요.한참 있다가 ‘내가 정경이다’그러면 깜짝 놀래요.전후 사정 설명하고 얘들 채팅문화에 관한 정보도 얻으면서 소주 한 잔 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집에는 컴퓨터가 없다고 했다.혼자 사는 몸이라 눈뜨면 출근하고 밤 11시가 되면 마지막 지하철 열차를 타고 귀가하는 일상을 반복한다.별다른 취미도 없다고 했다.60대 노총각의 적적함이 가슴에 와닿았다.그래서 기어이 못 할 질문을 했다.

-결혼은 왜 안했습니까.

“내가 내 모양과는 반대인 얼굴은 역삼각형이고 종아리가 가느다란 처녀를 좋아하는데 그런 처녀를 못만났어요.그러다 적령기를 놓쳐 버렸지요.”

-얼굴 갸름하고 종아리 가늘면 천하미인인데 욕심이 지나치셨군요.

“일중독에 걸려 못했다고 해둡시다.”

그는 스스로 일중독에 걸렸다고 말할만큼 궁리가 많은 사람인 듯했다.“아이디어가 저절로 순식간에 떠오른다”고 했다.70대년초 구청같은 데서 급행료를 받고 호적등본 따위를 띄는 비리가 사회적 문제가 됐을 때 복사기를 각 구청에 비치하면 직원들이 장난칠 시간을 원천적으로 없앨 수있다는 아이디어를 내 이를 실행케 했다.또 한 때 백색전화 값이 비리의 원인이 돼 문제가 되자 전화망 관리를 민간경영 방식으로 하면 해결된다는 방안도 자신이 냈다고 소개했다.

-법대 동기들 중에는 출세한 사람도 많아겠네요.

“동기 중에 내무부장관이 두 사람,헌법재판소장도 있고 대통령 비서실장 지낸 사람도 있습니다.친한 사람도 있어요.그 사람들 백을 썼으면 승진도 했을텐데 전혀 그러지 않았지요.”

-그 사람들 만났을 때 계급이 낮아 좀 쑥스럽지 않았습니까.

“벼슬은 못했지만 나만큼 한국을 위해 일했을까하는 자부심은 더 강합니다.나는 한 가지 일을 30년이 넘도록 했습니다.나는 국무총리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 경찰에 관한 인상이 결코 좋을 수없는 게 한국민의 솔직한 심정이다.그래서 흘리 듯이 물어봤다.사람들 사찰하고 끌고 가 곤욕을 치루게 한 적은 없냐는 것이었다.“평생을 외사 일만 했으니 그런 일이 있을 수없고 유신 때는 외국에서 보는 한국의 인권상황을 취합해 개선방안을 내놨다가 다른 기관에서 혼이 났다"고 했다.

[윤정경은 누구]

▶59년 서울법대 졸,64년 서울대 대학원(국제법)

▶62년 순경 이후 94년 퇴임(경위)까지 외사업무

▶68년 EDPS 정부위탁교육 1기생

▶78년 김포공항 수배자 적발 전산실 창설 초대 실장

▶94년 인터폴 컴퓨터 통신망 도입계획 참여

▶94년부터 인터폴 해킹사건 참여,95년 국내해커 1호 검거

▶99년 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창설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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