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그때 오늘

“너무 어리광 부리면 죽여라” … 공포 분위기 속의 을사늑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대안문 앞에서 일본군이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1905년 11월 17일 오후 을사늑약이 강박된 덕수궁 앞과 회의장 안은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기병 800명, 포병 5000명, 보병 2만 명이 서울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슬피 부르짖는(哀呼)” 참정대신 한규설이 별실로 끌려 나가는 순간 이토 히로부미는 “다른 대신들을 보며 ‘너무 어리광을 부리면 죽여 버리라’고 크지 않은 소리로 말했다”(『한말외교비화』·1930). 한규설·민영기·이하영은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다. 11월 18일 새벽 1시쯤 이완용을 필두로 이지용·이근택·권중현·박제순의 을사오적은 매국노의 길을 걸었다.

“이 조약은 일본과 같은 문명국으로서는 부끄러운 정신적·육체적 폭력으로 대한제국 정부를 강요해 맺어졌다 한다. 조약의 서명은 전권대사인 이토 후작과 하야시 공사가 일본군대의 무력시위 아래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로부터 얻었을 뿐이다. 이틀 동안 저항한 후 대신회의는 체념하고 조약에 서명했지만 황제는 즉시 강대국, 특히 워싱턴에 대표를 보내 가해진 강박에 대해 맹렬히 이의를 제기했다. 서명이 행해진 특수 상황을 이유로 우리는 1905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바에 주저하지 않는다.” 1906년 프랑스 법학자 레이는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논문에서 을사늑약이 ‘체결 시부터 효력이 발생되지 않는’ 원천 무효임을 이미 지적했다. 1897년 공포된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국제(國制)’ 9조에는 황제의 권한으로 조약체결권을 규정한 바 있다.

그때 황제는 늑약에 동의도 비준도 하지 않았다. “역사에 기록될 가장 중요한 일을 증언한다. 황제는 일본에 항복한 적이 결코 없다. 긍종(肯從)하여 신성한 국체를 더럽힌 적도 결코 없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미국의 협조를 구하고,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조선인 모두에 고한다. 황제가 보이신 불멸의 충의를 영원히 간직하라.” 1942년 해외독립운동 지도자들 앞에서 황제의 특사 헐버트가 한 증언처럼 그때 고종 황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힘을 다하다 독살됐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대한제국은 러·일 사이 힘의 균형 위에서 연명하던 모래성 같은 왕국이었다. 망국의 책임은 무한 불가침의 군권을 향유한 황제와 500년간 특권을 누린 양반들이 져야 할 몫이다. 약육강식의 국제질서하에서 자력 없이 타력에 의존해 살아남으려 했던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만 슬픈 역사를 쓰고 말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