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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경제학] 6.매니저의 등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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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1831년 파리에서 파가니니의 연주를 접한 프란츠 리스트(1811~86)는 '피아노의 파가니니' 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파가니니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라 캄파넬라' 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다.

무려 1천2백여곡(CD 2백장 분량)에 달하는 리스트의 피아노곡은 자신이 연주하기 위해 편곡 또는 작곡한 것이다.

그는 1840년 6월 9일 런던 하노버 스퀘어 룸 공연에서 '리사이틀' 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오케스트라의 도움 없이 피아노 한대로 대규모 청중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 것.

건반이 부서질 정도의 파괴력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낭만주의의 영웅' 이 탄생했다. 하지만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리스토마니아' (리스트 열병)로 명명한 이 집단 히스테리는 벌써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838년부터 유럽 순회공연에 나선 리스트는 파가니니와는 달리 개인 매니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현지 음악가들이 음악회를 주선하다보니 피아노 조율도 엉망인데다 포스터도 붙어 있지 않았고 매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1841년 2월 리스트는 마리 다구 공작부인의 제안으로 악보 사보가(寫譜家)가에타노 벨로니를 동반자 겸 심부름꾼으로 채용했다. 벨로니는 그후 6년간 리스트와 숙식을 함께 하면서 순회공연을 추진했다.

리스본에서 모스크바까지 낮에 연주회와 강연.무도회.파티로 바쁜 일정을 보낸 후 밤에는 마차에 몸을 싣고 유럽 전역을 누빈 것이다.

리스트는 과로 때문에 매일 6시간 동안 고열 증세를 보였다. 연주회수는 매주 3~4회. 모스크바에서는 1주일만에 4만 프랑을 벌었다. 당시 집 한채 값이었다.

벨로니는 단순한 비서가 아니었다. 그는 다음 공연장소로 미리 이동해 매표.대관.홍보 등 모든 상황을 점검했다.

다른 도시의 청중이 보여준 열광적인 반응을 그곳 신문에 게재했다. 여섯 마리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리스트가 마을로 도착할 때쯤이면 표는 이미 매진된 상태였다. 하이네는 벨로니가 박수부대를 고용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1840년대 리스트가 유럽 연주여행으로 얻은 수익은 22만 프랑. 모두 가족을 위해 예금했다. 하지만 부다페스트 국립음악원 설립, 본 베토벤 동상 건립 등을 위해 자선음악회를 열었으며 제자들에게 레슨비를 한푼도 받지 않았다.

말년에 지휘.작곡에 전념한 리스트는 1855년 세계 최대의 흥행업자 피니아스 바넘이 개런티 1백만달러로 제의한 미국 순회공연을 거절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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