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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허영섭 녹십자 회장 B형간염·독감 ‘백신 자주권’ 지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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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B형 간염 백신과 유행성출혈열 백신 개발을 주도하며 ‘백신 안보’를 몸소 실천해 온 녹십자 허영섭(사진) 회장이 15일 경기도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69세.

경기도의 휴전선 이북인 개풍이 고향으로, 1964년 서울대 공과대와 68년 독일 아헨공과대를 졸업한 뒤 박사 과정 중 귀국했다. 70년 녹십자 전신인 극동제약에 부장으로 입사해 척박한 국내 제약업 풍토에서 보건환경 개선에 힘썼다. 개성상인의 마지막 세대답게 탄탄한 재무구조와 내실을 중시하면서 제약사 녹십자를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분야에도 강한 생명공학 전문업체로 키웠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한 B형 간염 백신, 세계 최초의 유행성출혈열 백신, 세계 두 번째의 수두 백신 등은 불모지였던 국내 바이오 의약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 고인이 밀어붙인 전남 화순의 독감백신 공장은 신종 인플루엔자가 창궐하는 요즘 ‘백신 보안’의 상징으로 평가 받는다. 그는 백신공장을 짓기 전인 2004년 합작사업을 하자는 외국 제약사의 제안을 받았지만 “백신 자주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며 독자 건설을 밀어붙였다. 83년에는 “먼지가 쌓여도 이 땅에 쌓인다”며 B형 간염 백신으로 거둔 이익을 ‘목암생명공학연구소’ 설립에 썼다. 또한 91년 선천성 유전질환인 혈우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에게 체계적인 치료와 재활이 이뤄질 수 있도록 사회복지법인 ‘한국혈우재단’을 설립했다. 설립 첫해 4억5000만원을 지원한 이래 지금까지 260억원 이상을 출연했다.

고인은 항상 불굴의 정신을 주문했다. “남이 가지 않는 외로운 이 길을 용기와 의지를 갖고 묵묵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불굴의 개척자 정신과 정성· 용기만이 이 길의 필요한 동반자입니다. 이는 바로 녹십자 가족의 정신입니다.”

고희 무렵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뒤 서울 근교에서 외국인들도 반할 만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게 마지막 꿈이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숱한 공직을 맡으면서 국내외 비즈니스 협력에도 기여했다. 한국제약협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장과 한독상공회의소 이사장, 한독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국민건강 증진과 한국·독일 우애 증진, 제약경영 등의 업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 독일정부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2002년에는 아헨공대에서 ‘명예 세너터(Ehren Senator)’ 칭호를 받았다. 독일 대학의 가장 영예로운 칭호다.

고 허채경 한일시멘트 회장이 선친이고, 허정섭 한일시멘트 명예회장이 형이다. 유족은 부인 정인애씨와 성수·은철·용준씨 3남이다. 빈소는 분당 서울대병원 영안실, 발인은 18일이다. 031-787-1503.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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