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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도 좋지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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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140호 15면

고전 영화 ‘카사블랑카’의 주인공은 멋진 남성의 상징처럼 묘사되지만 정신의학적 관점으로 보면 알코올 중독 환자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가슴 아프게 헤어진 애인을 기적적으로 만났는데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해서 상황을 망쳐놓는다면 낭만적 객기라기보다는 알코올에 의한 병적 반응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 시인 이백을 비롯한 여러 문인과 예술가들에게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다 보니 마음결이 섬세하고 순수한 이들이 술에 빠지는 것이라 할지 모르지만, 알코올 중독은 어머니의 젖을 빨 듯, 술잔에 탐닉하는 미성숙함일 뿐이다. 흔히 술독에 빠진다는 말을 하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분석하자면 자궁 혹은 미분화된 무의식으로의 퇴행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특히 관계 때문에 상처받고 일에서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술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매스컴에 의한 집단암시효과를 고려한다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일과 사랑에 실패한 뒤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을 관습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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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중독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고통스러운 일만 있으면 술로 도망가려는 심리적 의존을 보이지만 다행히 주량 조절은 되는 경우, 또 신체적인 의존은 심각하지 않지만 신체와 사회적으로 여러 합병증을 보이는 경우다. 또 다른 유형은 내성 때문에 웬만큼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나 술을 끊으면 금단 증세를 보이는 형이다. 그리고 합병증은 있으나 세포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겉으로는 조절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물론 큰 병에 걸리는 것은 시간문제인 경우와 간헐적으로 술을 마시지만 한번 시작하면 완전히 기절할 때까지 가는 유형이 있다. 흔히 “필름이 끊겼다”고 말하면서 술자리에서의 실수를 얼렁뚱땅 넘어가는 이들이 있는데, 정신과적 진단을 하자면 이는 ‘블랙 아웃(black out)’이라는 전형적인 알코올 중독의 증상이다. 뇌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빨리 조치해야 한다. 금주 모임이나 정신과 의사의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시기를 놓치고 심각한 합병증에 시달리곤 한다.

알코올 성분은 뇌 속 전두엽의 ‘본능 억제 기능’을 다시 억제하므로, 술은 경직된 껍질을 벗겨서 생기에 넘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치면 예측하지 못한 과격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 요즘엔 중·고생조차 수능주·백일주·언약주 하는 식의 이름을 붙여가며 몰래 술을 잘 마신다. 일찍부터 술을 배우면 그만큼 중독에 빠질 가능성이 높고, 신체적·사회적 합병증도 심각하다. 자기 조절이 되지 않는 취한 상태에서 강간·강도·폭력 등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다.

최근 남의 나라 음식과 술에 대해서만 과도한 헌사를 보내는 문화사대주의가 극복되려는지, 막걸리를 비롯한 전통주에 대해 깊은 애정을 보이는 사람이 늘어나 반갑다. 하지만 어떤 술이든 지나치면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휘둘려 자기의 자식을 찢어 죽인 여신 메이나드나, 탐욕으로 딸과 가족을 모두 잃게 된 미다스의 상황이 현실화되는 것은 큰 비극이다. 비겁하게 술에 기대지 말고 깊이 숨어 있는 공허감·우울·좌절·애정결핍 등의 어두운 심성들과 정면으로 대면해야 진짜 자신을 찾는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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